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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Feb 07. 2023

에펠탑 닮은꼴,
노동자의 성모 마리아 성당

프랑스 성당 이야기 #15

  파리 Paris 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물이 있습니다. 파리 14구와 15구 경계에 있는 한 성당인데요,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이 프랑스를 대표하고, 에펠탑이 파리를 상징한다면 이 성당은 파리를 기념하는 건축물입니다. 사실 겉으로만 보기엔 여타 다른 성당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죠.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랍니다. 에펠탑과 너무나 흡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는 곳, 노동자의 성모 마리아 성당 Église Notre-Dame-du-Travail de Paris을 낱낱이 파헤쳐보겠습니다.



에펠탑과 두 번의 만국박람회

  에펠탑은 하늘에서 뚝 내려온 건물이 아닙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심심해서 지은 건축물도 아닙니다. 모름지기 건축을 하는 데에는 사용하는 목적이 있듯이 에펠탑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지어진 특별한 건축물입니다. 바로 1889년 프랑스혁명 백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서입니다. 만국 박람회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각 나라에서 보유하고 있는 가장 높은 기술력을 대놓고 자랑하는 국제 전시회입니다. 훗날 우리나라에서도 만국 박람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돌이를 캐릭터로 내건 1993년 대전 엑스포입니다. 만국 박람회와 엑스포, 한자와 영어의 언어 차이일 뿐 다 같은 말입니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 삽화


  아무튼 당시 프랑스는 파리 만국 박람회 EXPO에서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눈길을 끌만한 건축물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귀스타브 에펠 Gustave Eiffel이 철근을 이용하여 높은 건축물을 설계했고 그의 이름을 따와서 명명했습니다. 에펠은 근대 건축재료로 급부상한 철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약 300m, 아파트로 치면 81층에 맞먹는 높이의 건축을 세웠습니다. 프랑스의 최신 철근 제련법과 건축 기술을 제대로 뽐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00년 또 한 번의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20세기를 맞이하여 지난 시대를 기념하고 새로운 기술과 함께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박람회였습니다. 그래서 개최 장소도 기존에 만국박람회가 열린 적이 있었던 마르스 광장을 중심으로 다시 열었습니다. 마르스 광장은 에펠탑이 우뚝 세워져 있는 곳입니다. 이때도 프랑스의 우수한 신기술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게 했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삽화


만국 박람회의 숨은 공로자

  파리 만국 박람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경했을까요? 1889년에는 5월부터 10월까지 약 3천만 명이 구경했고 1900년에는 4월부터 11월까지 약 5천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 수와 맞먹는 사람들이 두 번이나 다녀간 것입니다.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사였던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만한 규모의 행사를 치러야 한다면 오랜 시간,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해서 준비해야 했을 겁니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로 정비, 조경 관리, 도심 인프라 구축, 서비스 관리 등 모든 곳엔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을 수 없겠지요. 두 번의 만국 박람회를 위해서 실제로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파리 근교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파리로 올라와서 만국 박람회를 준비하는데 참여했습니다. 노동자야말로 만국 박람회의 숨은 공로자인 것이죠!


노동자의 성모 성당


노동자들을 위한 새로운 성당

  해가 지나면서 노동자들에게 두 가지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노동자들에게 향수병이 짙게 드리웠졌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노동자들 집단 안에서도 출신 지역, 집안 배경, 노동 능력 등 여러 이유에 의해 계층이 나눠졌다는 점입니다.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성당으로 모였습니다. 아무리 프랑스 정부가 여러 혁명을 거쳐 종교 탄압을 가하고 종교와 사회를 분리한다고 하더라도 프랑스 사회에서 영적인 위안을 주는 장소는 성당 밖에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성모 성당 내부


그러나 이 성당의 크기는 너무 작았습니다. 불과 200명 밖에 수용할 수 없는 크기였던 것입니다. 당시 주임 신부였던 솔란지 보딘 Soulange-Bodin 신부는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성당을 짓기로 합니다. 기존의 노동자들을 수용하고 보담을 수 있는 역할뿐만 아니라 곧 있을 만국 박람회에 방문할 외부인까지 환영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당 이름을 노동자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정했습니다. 


철근을 이용한 노동자의 성모 성당 내부

 

 솔란지 신부는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에게 더 친근하고 위안이 될 수 있는 성당을 지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성당은 세상과 너무 구분되어서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마침 에펠탑 건축을 지켜본 솔란지 신부는 현대적 건축을 도입하여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르세 역을 지은 빅토르 랄루 Victor Laloux의 제자였던 줄스 아스트뤽 Jules Astruc에게 건축을 맡겼습니다. 줄스는 만국 박람회에서 건축 재료로 주로 사용했던 철근을 사용하여 성당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노동자들이 직접 만지고 다루는 건축 재료가 성당에 들어옴으로써 그들의 노동이 매우 성聖스럽고 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더불어 기존의 신자들이 낯선 건축 재료를 거부하지 않도록 성당 외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짓고 성당 내부에만 철근을 노출시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만국 박람회와 연관되어 모든 사람들을 환영할 수 있도록 최초의 파리 만국 박람회(1855)에서 사용한 철근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성모 성당은 1897년 첫 삽을 시작으로 1902년에 완공되었고 2016년에 프랑스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노동자의 성모, 노동자의 작업 도구들이 새겨져있다


왜 노동자의 성모 마리아?

  솔렌지 신부는 하필이면 왜 성당 이름으로 ‘노동자의 성모 마리아 Notre Dame du Travail’라는 호칭을 선택했을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마리아는 노동자들의 어머니이자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고 또 의로운 사람으로서 직업은 ‘목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한 마리아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훗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 인 것이죠. 어린 예수는 매우 지혜롭고 총명했다(루카 2,40)는 정도 알 수 있지만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성경엔 예수의 유년 시절 이후에 바로 서른 살의 예수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년 시절의 예수의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예수는 서른 살에 출가하기 직전까지 그의 양아버지인 요셉의 목수 일을 거들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유추를 해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경에 유년 시절 예수의 마지막 기록이 나오는데, 열두 살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살았다(루카 2,51)라고 쓰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매우 신성하고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기며 시대를 거쳐왔습니다. 


목수 요셉을 돕는 어린 예수 벽화


  고향과 가족을 떠나 국가적 행사인 만국 박람회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 그들에게 같은 노동자 요셉과 예수는 커다란 위안을 줬던 구원자였을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고 지지해 주었던 요셉의 아내이자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파리 노동자들에게 폭신폭신한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국 박람회를 마친 이후 백 년 동안 노동자들의 성모 성당이 있는 지역은 끊임없는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몽파르나스 역은 더욱 커지고 프랑스 철도청 건물이 건설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온 사업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 업무 공간이 들어섰습니다. 동시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적 주택도 만들어졌습니다. 노동의 성격은 바뀌었고 거주민의 상황도 바뀌었지만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이 성당은 아직도 문을 활짝 열고 모두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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