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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율 Oct 08. 2020

곰팡이는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01. 자취방의 곰팡이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다.


차라리 뜨거운 것보다 비 오는 날씨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시원한 여름'이라고 생각하며 기나긴 장마기간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더위 대신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곰팡이였다. 장마가 끝날 무렵, 자취방 천장 한 구석에서 원래는 보이지 않던 음침함이 느껴졌다. 어라? 저기가 원래 저렇게 거뭇했나? 음... 응? 설마 곰팡이?!


지금 사는 곳이 벌써 세 번째 자취방이지만 그동안의 자취방에 비해 상당히 쾌적하고, 지난여름도 별문제 없이 지나갔던 터라 곰팡이가 생길 거라고 전혀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곰팡이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기나긴 장마를 보낸 우리 집은 곰팡이가 번식하기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을지 모르겠다.


처음 벽 한쪽 구석에서 곰팡이를 인식한 순간,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설마... 다른 곳은 괜찮겠지? 슬픈 예감은 좀처럼 틀리지 않는다. 옷장, 신발장, 가방 모아둔 곳까지... 곰팡이로부터 안전한 곳이 없었다. 갑자기 뒤통수부터 시작해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다행히 곰팡이가 작은 부위에 부분적으로 피어 있었다. 하지만 주로 가죽 소재의 가방이나 신발, 겨울 코트, 점퍼 등 세탁기에 넣고 빨 수 없는 소재들에 곰팡이가 생겨서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그동안 자취생활을 꽤 오래 했지만, 살림은 여전히 초보다. 더군다나, 이렇게 곰팡이가 폈던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성을 되찾고자 잠시 숨을 고른 후, 유튜브에 '곰팡이 없애는 방법'을 검색했다.


그러나 유튜브를 아무리 뒤져봐도 가죽에 생긴 의류나 잡화의 곰팡이 없애는 방법에 대해 딱히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 주변 세탁소 몇 군데에 전화를 했다. 절망스럽게도 대부분 가죽에 난 곰팡이를 다루지 않는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친절한 세탁소 주인 분과 우연찮게 통화를 하게 되었다.

"저... 가죽 소재의 가방이랑 신발에 곰팡이가 생겼는데 취급해주시나요?"
"아이고, 그거는 세탁하기 까다로워서 일반 세탁소에서는 잘 안 해줘요."
"아.. 그런가요? 어쩌지..."
"심하게 곰팡이가 폈어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럼 수건 같은 거 따뜻한 물에 적셔서 살살 닦아봐요."
"그렇게 하면 좀 사라질까요?"
"꼼꼼히 안까지 깨끗하게 닦아줘요. 페브리즈 같은 거 뿌려주면 꿉꿉한 냄새가 좀 날아갈 거예요."
"네... 그렇게 하면 괜.. 찮겠죠?"
"그럴 거예요. 한번 해보고, 정 안 되면 버려야지 뭐. 허허"
"(ㅠㅠㅋㅋ)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세탁소 아주머니의 조언을 듣고, 반신반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곰팡이와의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 손에는 고무장갑, 얼굴엔 마스크, 버려도 될 티셔츠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곰팡이와 대면했다. 곰팡이를 닦아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진작 이런 꼴 당하기 전에 곰팡이 대비 좀 해둘 걸... 뒤늦은 후회는 언제나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 이미 엎질러진 물, 열심히 닦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의 시간을 보냈을까? 소름 끼치듯 강렬했던 곰팡이의 첫인상도 점차 무뎌져 갔고,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곰팡이를 닦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투자한 시간과 노력 덕분인지, 곰팡이의 자취는 조금씩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렇게 곰팡이 사태가 여차저차 마무리되는 가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곰팡이는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처음에는 오늘 겪은 곰팡이 사태를 날씨 탓으로만 돌렸다.  놈의 장마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다며 혼자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주변과 일상에 너무 무관심하진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다.  주변 환경의 변화에 조금만  민감했더라면 곰팡이가 이렇게 생기기 전에 대처할  있지 않았을까? 자취방의 곰팡이를 단순히 날씨 탓만  수는 없었다.   엄밀하게는 안일하고 무관심했던 태도였음을 시인한다. 귀찮고, 또 귀찮아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이쯤이야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 인해 내 삶의 터전이 엉망이 돼버린 걸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에 있어서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을 점차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조차 미처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인생의 큰 문제들만 중요시하고, 사소한 문제들이야 조금은 무심해도 괜찮겠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오히려 작고 사소한 것들의 미세한 차이가 삶의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을 조금씩 체감하고 있다. 주변에서도 삶의 작은 부분들, 사소한 것들을 잘 신경 쓰고 관리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자신의 삶에 안정적이고 주체적이다라는 인상을 받곤 한다.


이번 자취방의 곰팡이 사건은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팡이가 알려준 것이 있다면, 삶의 작고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신경 쓰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는 단지 내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나아가 내 몸과 마음에 대한 세심한 관심으로까지 적용해 생각할 수 있다. 이것들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자주 햇빛도 보여주고, 환기도 시켜주고, 무엇보다 자주 손길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래도 혹여 미처 막지 못하고 이미 피어난 곰팡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때는 세탁소 아주머니가 해주신 조언처럼, 따뜻한 물로 살살 문질러 닦아보면 어떨까. 물론 한번 생겨버린 곰팡이가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내 정성을 봐서라도 조금은 괜찮아질지 모르니 말이다.





한 줄 기록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 작고 사소하지 만은 않을 수 있다.
때로는 그것들에 대한 관심이 삶의 행복을 결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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