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오기 전에 비 오는 날은 배추 전쯤 구워 먹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둥근 볼을 준비하고 튀김 가루와 달걀 한 알을 넣는다. 볼에 찬물을 부어 반죽을 풀어주고 끝이 마르기 시작한 배추를 한 장 한 장 떼어내어 반죽 물에 골고루 묻힌다. 기름을 두르고 팬을 달군 뒤 배추 석장을 놓아주면 ‘치익’ 소리를 내며 팬에 자리 잡는다. 배추 끝 모양이 울퉁불퉁 자리를 잡고 노릇노릇해질 때 뒤집는다. 이제 양파와 청양고추를 절인 양념장을 준비! 빗소리가 들리게 창문을 활짝 열고 TV를 켠다. 나에게 비 오는 날은 배추 전 먹으며 빗소리 듣는 날이었다.
그런데 포니가 오고 나서는 비 오는 날이 달갑지 않아 졌다. 특히 장마철이면 곤란해진다. 비가 내리면 포니의 지루한 얼굴이 보인다. 이번에도 창문을 활짝 연다.
포니야 봐봐. 비 오지. 못 나가지. 언니랑 집에서 신나게 놀자.
비가 연달아 3일 정도 오게 되면 포니의 눈치를 슬쩍 살핀다. 어느 날엔 3시간을 산책해도 힘이 넘치는 포니이다. 집에서 놀아준다 한들 3일이 넘어가게 되면 낮잠도 잘 못 잘뿐더러 자기 꼬리를 쫓으며 ‘왕왕' 짜증을 낸다. 차라리 나도 산책을 나가는 것이 훨씬 편하다.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려본다. 장마라고 매일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니 잠시 멈추면 재빨리 산책을 나간다. 목욕을 각오해야 하지만... 우리가 빗길을 걸을 때 다리에 다 튀기 듯, 포니는 온몸이 바닥에 있는 것들로 뒤덮인다. 비 오는 날은 더 이상 배추전이 아니다.
강아지가 산책하기 알맞은 계절은 언제일까? 그것보다 언제 산책하기 어려울까. 이번엔 강아지와의 여름 겨울을 이야기하고 싶다. 여름에는 더워서 문제, 겨울에는 추워서 문제이다. 겨울이 되면 포니는 엉덩이를 달달 떨고 산책 줄을 잡은 나는 손이 꽁꽁 언다. 그래도 옷을 두세 개 입히면 걸을만하다. 사실 겨울보단 여름이 산책하기 더 여렵다. 피치 못하게 30도 넘을 때 나가게 되면 포니가 기절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된다. 혓바닥은 바닥과 닿을 정도로 내려앉고 숨은 1초에 3번씩 헐떡인다. 그러면 내 마음도 급해져서 포니를 안고 재빨리 목적지로 향한다. 나 혼자 있을 땐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냥 나가서 더워하고 추워하면 되었는데 이젠 아니다. 겨울에는 산책 전에 밖으로 나가 추위를 느껴보고 어떤 옷을 입힐지 결정한다. 여름이면 신발을 벗고 바닥에 발을 올려 포니가 밟기에 어떨지 확인을 한다. 이런 극한 계절에도 포니와 산책하면 소소한 행복을 얻을 때도 있으니... 겨울에는 조금이라도 볕 드는 곳을 찾아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햇볕을 쬔다. 한 손에 포니 줄을 잡고 머리 위로 볕을 받으면 행복하다. 30도가 넘는 여름은 무섭지만, 여름밤은 좋다. 밤 10시쯤 되면 언제 뜨거웠냐는 듯이 더위가 가신다. 반바지 하나 입고 낮에 하지 못한 산책을 실컷 하고 온다. 청량한 노래 하나 틀고 다리에 모기 좀 물려가며 달구경을 하면 여름밤은 즐기기 딱 좋다는 생각이 든다.
비 오는 날도, 너무 춥거나 더운 날도 산책이 쉽지 않다. 일 년 중 산책하기 최고의 계절을 뽑으라면 가을을 고를 것이다.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할 때의 오후 6시를 좋아한다. 은행나무와 노을이 예뻐서, 내 팔에 스치는 바람이 시원해서, 코에 가을 향이 맴돌아서 한참을 서 있는다. 내 생각엔 포니도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혓바닥을 내밀며 헉헉거리지 않아도 되고 겨울처럼 옷을 몇 개씩 껴입을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맨몸으로 털을 휘날려도 된다. 또 포니는 가을을 즐길 줄도 안다. 포니랑 산책하는 곳 중 사람이 잘 다니지 않고 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다. 가을에 가면 바싹 마른 잎이 떨어져 있다. 내가 낙엽을 들고뛰면 포니는 맹수처럼 낙엽을 쫓는다. 은행잎이 떨어져 있으면 포니는 그 꾸리꾸리 한 냄새가 마음에 드는지 멈춰서 코를 들이댄다. 나는 은행잎을 집어 포니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그럼 포니는 싫다고 머리를 털어버린다. 우린 이렇게 가을을 만끽한다. 포니와 함께 걷는 모든 시간이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딱 지금! 이 가을이다.
강아지와 함께 하면서 날씨와 계절을 보다 세심하게 느끼게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포니의 줄을 잡고 산책을 나가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나와 포니도 늘 함께 하겠지만 세상에 있는 것들이 변하듯 우리도 조금씩 달라지겠지. 우리의 계절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