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oia Mar 27. 2019

지나 온 적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미드나잇 인 파리>

*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평론가 이동진 씨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남긴 한줄평이다. 개인적으로 이 평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만큼이나 <미드나잇 인 파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제목으로 인용해봤다.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나온 적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온 적이 있는 세계'에는, 그땐 함께했지만 지금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떤 존재들이 있다. 사람은 한 해 한 해 나이가 드는 터라, 그게 노화든 성장이든 시간의 궤적을 따라 지나오며 어제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우리와 다르고, 다신 만날 수 없는 그때의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지나온 적이 있는 세계"


그렇다면, 겪어보지 못한 과거, 그러니까 '지나온 적 없는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단지 내가 겪어보지 못해서 더 멋져 보이고 한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서, 마치 내가 그 날들을 겪었던 것 마냥 그때에 대한 노스탤지어 (鄕愁)까지 느끼는 요상한 현상.



내가 열일곱이던 2012년은 '1990년대'의 해였다. 수지를 국민 첫사랑으로 만들었던 <건축학개론>,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서 그 이후로도 몇 편의 시리즈가 더 나왔던 <응답하라 1997>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해. 당시 많은 대중들이 그랬듯 나 역시 물밀듯이 밀려온 90년대의 향취에 젖어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동률에 빠져있었다. 전람회의 첫 데뷔 앨범 타이틀곡인 '기억의 습작'은 건축학개론의 메인 테마곡이었고,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취중진담', '기적'같은 김동률의 곡들이 여러 번 흘러나왔다. 그의 노래는 나로 하여금 새삼 시공간을 뒤흔드는 음악의 힘을 깨닫게 했다. 그 힘에 매료되었던 나는 그 해 내내 비교적 최근에 나온 솔로 앨범부터 , 스무 살의 그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린 대학가요제 대상곡까지 반복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감수성이 풍부한 고등학생이었어서, 혼자 있는 방 안 침대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었다. 반쯤은 노래에 감정이 동화되어서였고, 또 반쯤은 억울해서였다. 내가 딱 열다섯 살 정도만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이 노래들이 나온 그 90년대를 머리가 큰 상태로 살아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에. 그 시절 전람회의 앨범을 들을 때만큼은, 90년대 초중반 그 어드매가 나의 고향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낭만적인 날들을 모두 겪고 나서 한참이 지난 지금 그 날들을 돌이켜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곤 했다. '한번 살아보고 싶다.'가 아닌, '다시 돌아가고 싶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94분 만에 파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대단한 영화다. 아마 2010년대 이후, 외지인들 (주로 일본인들)이 파리에 대한 환상과 실상 사이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해 겪는다는 정신적 질환인 '파리 신드롬'을 일으킨 가장 큰 주범은 이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만큼 이 영화 속 파리는 말이 안나올 정도로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그 낭만성은 아름다운 미장센만에 기대지는 않는다.

근현대의 예술계, 특히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하는 한 남자가 파리의 한 밤 중 골목에서 낡은 푸조 한 대를 타고 진짜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피카소, 달리, 헤밍웨이, 스콧 피츠 제럴드와 같은 예술가들을 만난다. 평소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사랑하는 인물들과 그 시대를 여행한다는 이 상황 자체가 얼마나 낭만적인가. 여기에다 우디 앨런은 그 자체로 1920년대의 상징인 것 같은 플래퍼 걸과의 로맨스까지 얹어놓는다. (심지어 이 플래퍼 걸은 마리옹 꼬띠아르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사실 여자는 자신이 사는 1920년대가 아닌 1890년대의 파리를 늘 동경해왔던 것이다. 그녀는 마차를 타고 벨 에포크 시대로 가, 평소 그녀가 사랑하던 드가와 고갱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드가와 고갱은 자신들이 사는 벨 에포크 시대가 아닌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한다.  



인간은 늘 지나 온 적 없는 세계를 동경한다. 이 보편적인 본능을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녹여낸 영화는 '과거에 대한 동경'을 넘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신이 살던 시대까지 버리고 벨 에포크 시대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여자나, 내가 봐도 지나치게 1920년대에 푹 빠져있는 남자의 감정을 단순히 '동경'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때를 '다시 돌아가고 싶은', 혹은 '돌아가야만 하는' 고향처럼 느꼈던 것이 아닐까.


지나온 적 없기 때문에 동경하고, 상상하고, 또 꿈꾸다 보면, 지나온 적 없는 과거의 세계가 '지나왔던 세계'처럼 느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겪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이 모순적인 감정은 사실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이동진 평론가가 이 감정 앞에 '근원적'이라는 표현을 덧붙인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지만 또 동시에 당연히 말이 되는 이 환상은 그 자체가 인간의 근원적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통조림으로 만들어진 봄 <4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