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일기. [수치심 권하는 사회 - 브레네 브라운]에서 알려주는 공감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공유하고 싶은 정보 하나. 최후의 보루 할 때 보루는 담배 한 보루의 보루가 아니다.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보루의 뜻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며 돌아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이다. (반면 담배 한 보루의 보루는 일본어가 어원이라고 한다. 전혀 다른 단어이다.)
자연 임신이 바로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나에게 말했다. 걱정 말라고, 정 안되면 시험관 시술도 고려해 보라고. 시험관 시술만 하면 한 번에 임신이 될 거라고. 정말로 한 번에 될 거라고 믿은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시험관 시술은 임신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할 만큼 하고 정 안되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비장의 카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데에서 짜잔 하며 내세우는 궁극의 방법 같은......
그렇게 임신 준비를 위한 마지막 단계로 시험관 시술을 시작했으나 결론은 여섯 번의 착상 실패를 겪고, 내년에는 병원을 바꾸고 일곱 번째 시도에 들어간다.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던 시험관 시술도 나에게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난임에도 저마다의 원인이 있는 데 나의 경우에는 굉장히 희귀하게 생겨먹은 신체 기관이 문제가 되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수정란을 이식할 수가 없어서, 매번 수면 마취를 하고 수술적인 방식으로 이식을 하게 되는데 (기다란 바늘을 자궁 바깥에서 근육층을 뚫고 안으로 찔러 넣어 수정란을 넣는 방식이라고 한다 - 네이버에 검색 결과가 하나도 없어서 구글로 정보를 찾아야 했다) 이 방식은 일반적인 이식 방식 대비 착상률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일은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는다. 시험관 시술은 아니고, 남들 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시험관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걸 목표로 시도해보는 수술이다. 그런데 수술이 성공해도, 꼭 '일반적인 방식'을 시술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보장되는 건 아니다. 그저 시도일 뿐이다. 이번 수술명은 그래도 네이버로 검색이 된다. 2015년에 먼저 수술을 받은 사람의 후기가 딱 하나 남겨져 있다. (물론 그 수술은 받은 사람이 그 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굳이 인터넷에 글을 남길 일은 아니니까, 다들 조용히 받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분의 아이디로 검색해서 최근 글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분은 최근에 아이 육아 용품을 중고로 거래하는 글을 올려둔 상태였다.
그러니까 '최후의 보루'라는 건 없다. 임신을 위해서 시험관 시술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너머의 단계가 있었다. 지금 나의 바람은 다시 한 단계 앞으로 가서 남들 하는 방식으로 정상적인 시험관 시술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이 정말 최후의 단계냐면 그것도 아니다. 매번 착상에 실패한 덕분에 나는 아직 유산을 겪지 못했고, 그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어떤 과정보다도 힘든 일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도 그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최후의 보루, 배수의 진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눈 앞에 문제(Problem)을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한다. 회사 진급교육 때 배웠던 이슈 해결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 나의 계획은, 브런치에 쓰는 난임 일기에는 나의 난임 원인과 같은 자잘한 정보는 적지 않는 것이었다. 구구절절이 나의 자궁은 어떤 모양이고 남들과는 어떻게 다르다는 오늘과 같은 이야기는 허공에 뜬 하소연이 될까 두려웠다. 그러다 결국 용기를 내고 써 내려간 이유는 오후에 읽었던 책, [수치심 권하는 사회 - 브레네 브라운, 가나출판사] 덕분이다. 아직 초반부를 읽는 중이라 책에 대한 소감을 정리하기는 어렵고, 오늘 읽었던 대목 중에 "공감"에 관한 문장들을 몇 개 옮겨와 본다.
- 나는 공감을 '상대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p 64)
- [완벽한 공감에 관하여] 상대가 정확히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상대가 이야기한 경험에 내 마음을 열기 위해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살짝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필요한 삶의 한 부분을 살짝 떠올렸다면 비판하지 않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 (중략)
우리가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만 공감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자. 아마 다들 무척 외로워질 것이다. 인생 경험은 지문과 같아서 똑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떤 느낌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p91)
- 공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더 깊이 파고들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회복지사 마키 맥밀런은 이런 글을 썼다. "공감은 몇 번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가 진실로 돌아가게 해주는 선물과 같다. 공감은 타인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치유해준다." (p94)
[수치심 권하는 사회 - 브레네 브라운, 가나출판사]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공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우리, 오래 고생하진 말자고, 그래도 여기에 나도 함께 있다고. 완전히 똑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이 간절함을 우리는 함께 통과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