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브런치북이 있잖아요.
난임 일기는 독자층이 너무 적어서 책을 내기 어려울 거예요.
블루투스 스피커에 유튜브에서 '걸그룹 여름노래'로 검색한 2시간 38짜리 음악 메들리를 연결하여 틀어놓고 그동안 올렸던 내 글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트와이스의 Cheer Up을 들으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이 글을 쓴다. 모모랜드의 Baam으로 음악이 바뀌고, (사실은 처음 듣는 노래인데) 흥겨운 멜로디를 따라 내 몸은 지금 어설픈 허리춤을 추고 있다. 어차피 오늘 남편은 회식, 거실은 나만의 무대다.
브런치에 처음 난임 일기('임신은 쉬운 일도, 당연한 일도 아니에요')를 쓴 건 2018년 9월 26일,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던 9월 7일에서 3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4개월 뒤에 두 번째 난임 일기('굴욕 의자에 굴복하지 말아요')를 올렸으며, 9개월 뒤에 세 번째 글('내가 너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을 발행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게으르다. 이렇게 엉성 엉성하게 글을 올릴 거면 처음 브런치 작가 되었을 때 왜 그렇게 좋아했었는지 모르겠다.
시험관 6차 이식을 진행했을 때는 처음으로 회사에 일주일 연차를 냈다. 5일 연속으로 쉴 수 있는 하계휴가를 해외여행이 아니라 집에서만 지내는 방콕 요양으로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온몸의 신경을 자궁에만 집중한 채 감성 폭발 직전의 상태에서 아홉 편의 글을 썼다. 그 일주일 동안 올린 두 편의 글이 다음 메인에 올라가며 각 1만 회와 2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덕분에 얻은 조회수와 구독자수, 댓글과 좋아요의 힘으로 시험관 6차 이식을 끝내 실패하고 나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사용하는 메모 앱 Notion에는 작년부터 브런치 전용 폴더가 있었다. 막상 글은 쓰지 않으면서 이런 글을 써야겠다며 온갖 소재들과 에피소드, 아이디어들을 모으고 있었다. 책을 읽는 행위와 관련된 소품들, 읽지 못한 책들과 읽지 못한 이유들, 러닝머신 위에서의 에피소드들을 틈틈이 적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쓰게 된 건 난임 일기였다. 난임 일기는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써야만 했던 글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을 기꺼이 포기하고 일기를 적었다.
어느 독립 책방의 에세이 쓰기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였다. 브런치에 난임 일기를 꾸준히 올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함께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나 힘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참여했다. 무엇보다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난임을 겪지 않은, 난임과 상관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었을 때의 소감을. 늘 이 경험을 함께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날은 난임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다. 요즘은 비혼도, 딩크도 많고 산후우울증을 겪는 여성들도 많지만 또 한쪽의 세계에는 임신이 간절한 사람들도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작은 책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따뜻하고 세심한 독자들이었다. 미리 A4용지로 출력해간 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의 공간에서, 나의 눈을 바라보며 공감과 독려를 나누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충만한 경험이었다. 막 글을 쓰기 시작한,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문장 하나 쓰는 게 수능만큼이나 어려운 초보 브런치 작가의 글을 시간 내어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난임 일기는 독자층이 너무 적으니 책으로 내기는 어려울 거라고. 아예 나중에 임신을 하고, 육아를 하게 되면 그 일기들을 한 번에 묶어서 책으로 내는 것이 좋을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임신을 준비하면서 겪는 시댁, 혹은 친정 엄마와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가 '신혼 일기'라는 콘셉트로 써도 좋을 거라고 했다. 여성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조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쓰면 독자층도 더 넓게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기성 출판사를 통해 여러 권의 책을 내고, 독립 출판을 다루는 프로 작가의 진심 어린, 동시에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알았다. 지금의 나에게 책을 내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브런치 구독자를 많이 확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글을 쓰고, 많이 팔릴 책을 내는 것은 나의 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런 글도 내년에는 쓰고 싶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독자층이 매우 한정적인 난임 일기를 적는 것이 최우선이고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다. 난임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소수의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지금 겪고 있는 세상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일이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는, 진료실 앞 대기실에 간절한 부부들이 빈 자리 없이 가득 차있고, 겨우 5분 안팎의 진료를 보기 위해 다들 1시간 2시간도 넘게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아늑한 독립책방에서 나는 나의 고집을 다시금 확인했다. 지금 나는 난임 일기를 굳이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내 손으로 책도 발간할 것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플랫폼에서 모든 작가들에게 주는 선물, 바로 브런치 북이라는 형태로. 나만의 난임 일기를, 나만의 작품을 오리지널 초판 브런치 북으로 완성할 것이다. 아직 나의 시험관 시술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써야 할 글들은 남았지만, 지금까지의 글을 한 번 갈무리해서 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성과가 될 것이다. 작년에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올해는 첫 브런치 북을 발간한다. 내년에는 조금 더 욕심을 내볼 것이다.
어쩌면 난임을 겪고 있기에 나는 글을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달리는 일상을 쓰는 건 내 성격에 계속 내일로, 모레로 미루게 되었을 거다. (내 필명 '모레'는, 오늘 할 일을 내일도 아닌 모레로 미룬다는 지극히 게으른 발상에서 나왔다.) 시험관 시술과 씨름하는 오늘은 내일로도 모레로도 미룰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다. 언젠가는 육아 일기도 쓰고 일상 에세이도 쓰다가, 그래도 나의 첫 글은 난임 일기였음을 기억하게 되는 날을 기약하며 나의 첫 브런치 북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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