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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Sep 04. 2020

시험관 시술을 열 번 실패하고 알게된 것

2년 9개월 동안 가장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


고백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내가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고 5번째 이식을 실패했을 때쯤이었다. 즐겨보던 이웃의 난임 일기의 내용이 그날따라 내 심기를 거슬렀다. 시험관 1차 시술을 막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글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추스리기가 어려워 펑펑 울었다고 했더. 남편은 그런 아내를 안쓰러워하며, 네 몸이 우선이라며 시험관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우릴 둘이만 잘 살아도 된다고 위로를 건넸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세상은 이미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응원하는 척 공감 버튼을 눌렀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었다.

'겨우 1차 시술 실패한 거 가지고.'


내 마음이 한 없이 좁아져 있던 부끄러운 때였다.


막 10차까지 실패로 확인된 오늘, 나는 그때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2018년 1월 첫 시험관 시술을 시작한 이후로 2년 9개월. 이 기간 동안 내 마음이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2017년 12월 겨울이다.



첫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기 한 달 전이었다.


2년 간의 임신 시도 끝에 드디어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궁 내시경 시술을 받았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담당 의사는 어쩌면 시험관으로도 아기를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혹시 임신을 하게 되더라도 유산과 조산의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나는 회사 점심시간을 사용해서 잠시 외출을 하고 병원을 가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잘해보자는 의사의 당부를 듣고 병원을 나와서, 나는 길거리에서 남편에게, 엄마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하늘이 무너지도록 펑펑 울었다. 병원은 번화가의 사거리에 있었고, 전화기를 붙들고 오열하는 내 앞으로 점심 식사를 막 마친 회사원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그날 저녁 엄마는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회사로 찾아왔다. 오후에 병원을 갔다 왔다고 했다. 엄마는 일 년 전 유방암 1기 수술을 받았던 여성 병원을 찾아가, 담당 의사에게 딸아이의 대리모가 되어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의사는 법적인 걸 모두 떠나서, 엄마가 혹시라도 대리모 역할을 하게 된다면 유방암이 재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네이버의 어느 글에서 인도네시아인가 어디에서는 대리모가 합법적이라는 정보를 확인한 후(*확실치 않다), 5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딸의 회사까지 찾아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만 원한다면 엄마가 대리모가 되어줄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꽤 간절하게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나는 단칼에 잘랐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데 그건 절대로 선택 안이 될 수 없다고. 차라리 아이가 없이 살겠다고. 집에 와서 나는 그날 점심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그 후 지금까지도, 그 날은 내 평생 가장 많이, 오래 울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시험관을 스무 번을 해서라도 아이만 생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적처럼 1차 시술 후에는 피검사 점수가 조금 나왔다. 임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저조한 수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피검사까지 받으러 갔다. 결국 2차 때는 그보다도 더 떨어져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후 시험관 이식을 열 번 진행하면서 조금이라도 피검사 점수가 나왔던 건 1차 시술 때뿐이다. 1차 시술 때는 나도 나지만 담당 의사 선생님이 자신감을 얻었다. 시험관 준비를 위해 호르몬 조절을 하며 먹었던 약이, 나의 선천적인 신체적 결함을 크게 보완해주었다고 했다. 다른 시험관 시술을 하는 분들보다는 조금 불리하지만, 계속 시도하면 임신이 안 될 건 없을 거라고 했다.


그 후 시험관 시술에 실패할 때마다 가장 가슴 아파하는 건 엄마다. 그러면 나는 늘 오빠와 나는 괜찮다고, 즐겁게 놀고 있다고 전한다. 내가 자궁경 검사 결과를 들었던 날, 엄마가 급히 대리모까지 알아본 이유는 딸아이가 자식 없이 살게 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댁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그래서 내가 외로워할까 봐, 외로워서 힘들어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나와 남편은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혔다. 시부모님은 우리를 응원해주시되, 꼭 아기가 없어도 우리 둘만 잘 살면 괜찮다고 말씀해주신다. 나는 매번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한다. 엄마의 딸은 여전히 사랑 받고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실패에 무뎌지고 있다. 그건 슬픈 일이면서도 좋은 일이다. 이제 나는 처음 각오했던 스무 번의 시험관 시술 중 딱 절반을 건너왔다.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아이를 기다리고 있고 계속 노력을 이어나갈 테지만, 혹시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이 확신이 지금처럼 단단해지기까지 열 번의 시험관 시술이 필요했다.


그 동안 나는 이식 실패 결과 전화를 받을 때마다 더 오버하며 괜찮은 척을 했다. 그날따라 남편을 더 많이 끌어안고 하루 종일 남편 옆에 붙어 다니며 평소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오늘, 열 번째 실패 결과를 듣고 나는 평상시와 다름 없이 중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나는 이전에 시험관을 진행했던 그 어느때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정말로 가장 힘들었던 건 나보다 그 블로그 이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한다. 내가 자궁경 검사를 하고 나서 겪었던 아픔을 이웃은 시험관 1차 이후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가 뭐라고 타인의 불행의 정도를 판단하려 했을까. 다들 겉으로는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굴곡 어느 지점을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그리고 오늘 나는, 진짜로 꽤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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