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기술 1
여러 해 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를 다룬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2013)을 보는데 그의 눈썹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백발이 다 되었는데 특유의 두툼한 눈썹만은 여전히 짙고 까맸다. 그 흑백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이었다(아, 물론 눈썹 가장자리에 새치가 없진 않았다). 하야오 감독은 책상에 앉아 그림 콘티를 만들다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 왜 70이 넘은 사람이 여기서 일을 해야 하는 걸까요?
이때 그의 나이가 72세다. 오전 11시에 출근해 오후 9시에 일을 마친다. 매일 일정하다. 책상에 앉아 일하고, 마사지를 받고, 체조를 하고, 샤워를 하고, 쓰레기를 줍고,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 그러나 일상의 분위기는 무겁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나고 1년이 조금 지난 때이다. 하야오 감독의 말과 표정엔 그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원전 반대 시위에 참가한 그의 사진이 잠깐 보이기도 한다.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이 계속 지배하는 자신의 나라를 걱정하고, 예술적 표현까지 제약받는 것에 분개한다. 그런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하야오 감독과 지브리 직원들이 꾸역꾸역 ⟨바람이 분다⟩를 만드는 모습을 다큐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바람이 분다⟩를 개봉한 뒤 2013년 9월에 하야오 감독은 장편영화 제작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장편 영화를 만들고 있다! 하야오 감독이 다시 장편영화 제작 일선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또 다른 다큐멘터리 ⟨네버 엔딩 맨: 미야자키 하야오⟩(2016)*에 잘 그려져 있다. 장편 제작 은퇴를 선언한 뒤에 지브리 미술관에서 상영할 단편 ⟨털벌레 보로⟩를 준비하던 하야오 감독은 프로듀서이자 그의 오랜 동료인 도시오 스즈키의 조언에 따라 3D 컴퓨터 그래픽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새로운 CG팀을 만나고 나서 살짝 고무된 그에게 다큐 감독이 묻는다.
- 감독님께서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걸 보니 신나는데요!
- 저는 '도전'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는 거죠. 앞으로, 늘 앞으로···.
하루 일과 중 하나인(?) 마사지를 받으며 마사지사에게 건네는 말도 예사롭지 않다.
- 내 어깨는 끓여도 국물도 안 나올 거예요. 시커먼 물만 나오겠죠. 셜록 홈스라면 알 겁니다. 내가 '애니메이터'라는 걸요. 나는 지치고 병약한 노인입니다.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겠죠. 내게 남은 시간으로 뭘 해야 할까요?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완성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올해 81세이다. 2021년 11월 뉴욕타임스 스타일 매거진 인터뷰 기사에 실린 하야오 감독의 사진을 보았다. 전보다 야위었고,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눈썹이 이제 많이 샜다. 검은색이 반쯤 남아 있었다. 눈에 익은 작업복 앞치마를 걸치고 아틀리에 문 앞에 서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왜 하야오 감독의 눈썹에 계속 눈길이 가는 걸까? 그의 흰머리, 흰 수염에 대비되는 선명한 검정 눈썹을 보며 나 자신을 투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찍이 20대 중반부터 새치가 생기기 시작해 40대 초반에 이미 반백(半白)이 된 나다. 어린이들은 나를 보면 “머리가 왜 그래요?”라고 묻고, 길을 가다가 머리카락과 얼굴의 부조화를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이가 지금도 더러 있다. 어느덧 50대가 되고 보니 흰머리가 더 늘고, 눈썹 가장자리에 반갑지 않은 새치가 나타났다. 하···. 내 눈썹. 내가 좋아하는 까만 갈매기 날개 눈썹도 이제 어쩔 수 없구나. 그렇게 세월을 실감하는 것이다.
여느 50대의 고민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독립시킬 때까지 내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을까? 아이들 독립하고 나면 우리 부부의 노후 경제는 대비되어 있는가? 지금이라도 ○○에 투자해야 하나? 이 나이 되도록 내가 이룬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안과 조바심. (이때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연금 이외에 돈으로 돈을 튀기려는 노력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그런 걸 잘할 수 있는 기질이 아닌 걸 잘 안다. 그럴 돈도 없다(차라리 속 편하다!). 그럴 바에는 내가 노년에 할 일을 위해 지금부터 조금씩 시간을 투자하는 게 내게는 수익 확률이 더 높은 투자가 아닐까?
나는 '그동안 내가 쌓아온 그래픽디자인, 북디자인, 타이포그래피디자인이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외에 새로운 창작의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쓰고(write), 그리고(paint), 만드는(make) 창작의 형태가 내가 노년에도 지속할 수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나도 하야오 감독처럼 눈썹이 하얗게 샐 때까지 꾸준히 일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지금 시간을 투자하려는 것이다.
하야오 감독의 말로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2016년 8월 초, 장편영화를 한편 더 만들기로 결정한 하야오 감독은 다큐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비장하다.
- 아내한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면서 이해해달라고 해야죠. 영화를 끝내기 전에 세상을 떠나도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다 가느니 차라리 일을 하다 갈 겁니다. 보람 있는 일을 하다 가는 거죠.
* ⟨네버 엔딩 맨: 미야자키 하야오⟩(NHK, 2016)은 KBS ⟪세상의 모든 다큐⟫, ⟨미야자키 하야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축약본으로 편집해 2018년 3월 21일 방영되었다. 인용된 말은 이 KBS 방송분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