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01] KBS <개소리>의 어르신들
KBS 2 드라마 <개소리>는 노년의 삶을 그린 드라마다. 실제로도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베테랑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름 그대로 연기한다. 극의 설정도 노배우 순재(이순재)와 함께 드라마를 만들던 친구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실제 배우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개소리>는 '개의 말을 듣고 마을의 사건을 해결한다'는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서도 현실감이 살아 있다.
특히 인물들이 보여주는 노년의 일상은 실제 어르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둡고 칙칙하기보다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노년의 친구들이 서로를 돌보는 모습 역시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노년의 삶도 경쾌하고 즐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나이 듦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노년기의 마음과 일상
순재(이순재)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배우다. 같은 드라마에 캐스팅된 인기 배우 현타(남윤수)는 순재와 함께 연기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PD는 대세 배우 현타의 손을 들어준다. 젊은 주연 배우의 반대로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된 순재는 소변을 급히 해결하다 사람들 눈에 띄고 만다. 그런데 하필이면 순재가 소변을 해결한 장소가 현타의 차다. 그렇게 순재는 대중들의 비난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소속사 사장 철석(이종혁)의 명에 따라 거제도의 별장으로 내려간다.
이 과정에서 순재는 "내가 왜 집에 틀어박혀 있어? (...) 나 이순재야. 이보다 더한 것도 겪었어!"(1회)라고 큰소리치며 당당한 척 행동한다. 하지만, 1회 영화사 미팅을 위해 카페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묘사됐듯, 순재의 마음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은 대중들의 시선에 잔뜩 움츠러든다. 이런 순재가 호통을 치며 타인을 대하는 건 드라마에서 하차당하고, 소변조차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위축된 모습에 대한 방어였을 것이다. 나이 들고 취약해진 모습을 '강함'으로 가리고 싶었을 테다. 이런 순재 곁을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간다. 순재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감추며 혼자 고립된다.
그런데 홀로 된 순재를 돕기 위해 친구들이 허락도 없이 찾아온다. 라이벌 배우 용건(김용건), 전성기를 함께 했던 드라마 작가 수정(예수정), 분장사 옥숙(송옥숙), 조명기사 채무(임채무) 4인방이 바로 이들. 이들은 아무 말 없이 순재의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순재가 "돌아가라"고 화를 내도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별장 마당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순재 곁을 지킨다.
하지만 노년들끼리 모여 있으면서 '웃픈' 일들도 발생한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지만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의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다 먹기를 포기하고(2회), 무인 햄버거 가게에서도 주문하지 못해 당황한다(2회). 삐걱거리는 몸은 늘 작은 실수들을 반복하고, 이들의 일상은 느릿느릿 흘러간다. 이는 실제 노년기 일상의 불편함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서로 돌보는 노년의 친구들
순재와 친구들은 이런 불편들을 경쾌하게 헤쳐 나간다. 무인 햄버거 가게에서는 동네 꼬마에게 도와 달라 요청해, 키오스크 사용법을 배운다. 이후 수정, 채무, 옥숙은 다시 햄버거 가게에 들러 편안하게 햄버거를 사 먹으며 뿌듯해한다(2회). 젊은이들처럼 소문난 맛집에 줄을 서 보지만 재료 소진으로 영업이 종료되자 쿨하게 돌아서 "만들어 먹자"며 의기투합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들은 함께 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배워가며, 현재를 누린다.
나이 들어 노쇠해지는 신체 기능에 대해서도 유머로 서로를 위로한다. 수정과 옥숙은 자가용 색조차 헛갈리는 용건을 보고 "치매 아니냐"고 쓴소리를 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머리에 쓴 선글라스를 찾고(수정), 버리러 나간 쓰레기를 다시 가지고 들어온다(옥숙). 이들은 이런 모습들을 공유하면서 웃어넘기고 '치매예방 게임'을 하면서 불안을 함께 달랜다(4회).
한편, 드라마 속 인물들은 자녀를 비롯한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다. 순재의 아들 기동(박성웅)은 결혼식을 펑크 낸 후 아버지를 피해 살고 있고, 채무의 아들은 한집에서 살면서도 채무만 빼고 다른 식구들과 해외여행을 가버린다. 용건의 딸 세경(이수경) 역시 아버지와 소원한 사이다. 이들은 자녀들에 대한 서운함도 솔직히 나눈다. 2회 채무가 혼자 거제에 온 이유를 솔직히 털어놓자 수정은 채무 아들을 함께 욕해준다. 이런 모습들은 자녀를 자랑하며 자녀를 통해 위신을 세우려 하는 젊은 부모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이는 노년기에 이르면 사회적 지위나 부모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에 가능한 모습들이었을 테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우정은 무척 진솔해 보였다. 약점을 드러내고 때로는 서로를 타박하면서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들은 순재의 험담을 하면서도 순재 곁에 있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순재만 일방적으로 돌봄을 받는 건 아니다. 순재의 별장에 들어온 첫날 바비큐 파티장 화재에서 이들을 구하는 건 바로 순재였다. "순재 형 혼자 있는 거 돌봐주러 왔는데 오히려 형 덕에 죽다 살았네"(1회)라는 용건의 말처럼 돌보러 온 이들 역시 순재의 도움을 받는다. 이렇게 노년의 친구들은 돌봄을 순환시킨다.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를 돌본다.
마을을 돌보는 어르신들
이들은 거제의 마을 공동체와도 도움을 주고받는다. 순재는 순경 초원(연우)의 부탁으로 은퇴한 경찰견인 소피를 잠시 돌보게 되는데 그 덕분에 소피의 말을 알아듣게 된다. 그리고 소피의 말을 믿고 이를 확인하며 마을에서 벌어진 석연찮은 사건들의 진실을 알아간다. 순재가 소피를 돌보지만, 소피 역시 사람들을 돌보며 서로가 서로를 돌 본 셈이다.
특히 자살로 마감될 뻔한 유튜버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장면은 순재와 그 친구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순간이었다. 작가 수정은 초원에게 대본을 써주고, 옥숙은 분장을 해주며, 채무는 조명을 밝혀 영상을 찍어준다. 이 영상을 활용해 순재와 친구들은 경찰을 도와 범인을 잡는다(2회). 펜션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거제에 온 어르신들은 진실을 밝히는 데 큰 힘이 되어 준다(4회).
특별한 사건뿐만이 아니다. 수정, 옥숙, 채무는 학원에 치여 울고 있는 동네 꼬마를 도와주고, 꼬마는 이들에게 키오스크 사용법을 알려준다(2회). 옥숙은 신혼부부의 촬영을 지켜보다 귀걸이를 잃어버린 신부를 도와주기도 한다(3회). 잔잔한 일상에서도 누군가를 돌보고, 돌봄을 받는 셈이다. 서로 순환하며 돕는 모습들은 경쾌하고 따뜻했다.
<개소리>를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고령화 사회'를 '위기'로 여기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편견 아닐까. 노년의 삶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돌봄을 받기만 하며, 사회에 짐이 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드라마처럼 노년의 삶도 즐겁고 유머러스하며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 또한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공동체를 돕는 일들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고령화 사회를 위기로 인식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안에 늙음에 대한 터부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노인요양시설을 운영하며 오랫동안 노년의 삶을 지켜봐 온 무라세 다카오는 저서 <돌봄, 동기화, 자유>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들며 약해지는 것을 체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 있는 슬픔도 기쁨도 깊이 맛보고 싶습니다. 몸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그럴 때 세계는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윽고 나는 죽겠지요. '나'라는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그리고 몸속의 에너지를 모두 불태우고 죽는 모습을 영혼으로 느껴보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개소리>를 보면서 늙음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고 조금은 말랑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