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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을 바라보는 법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27] SBS <트라이 : 우리는 기적이 된다>

by 주연

'리즈시절'


인생의 지나간 전성기를 뜻하는 말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이 말이 아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한 스포츠 스타나, 연예계 스타들이 TV에 나올 때면 그들의 리즈시절이 떠올라 뭉클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에 이런 질문이 일곤 했다.


'리즈시절을 지난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까? 나 또한 생산성이 떨어지는 나이로 접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SBS 드라마 <트라이 : 우리는 기적이 된다>는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은 어린 나이에 '리즈시절'을 맞이하고, 은퇴한 운동선수들이다. 그런데 리즈시절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이들의 삶은 달라진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을 통해 리즈시절을 바라보는 법을 살펴본다.


주가람 – 후회하되, 흘려보내고, 의미를 추구하다


IE003515284_STD.jpg ▲가람은 자신의 '리즈시절'을 떠나보내고, 한양체고 감독으로 부임한다. SBS


가람(윤계상)은 대한민국 럭비의 가장 위대한 스타 중 한 명이다. 한양체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국가대표로 뛰면서 아시안컵 우승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삶에서 절정을 누리던 그때, '중증근무력증' 진단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대표팀 감독 현종(강신일)에게 알리려 하지만, 현종은 결승전을 앞둔 상태에서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합으로 떠밀린 그는 근무력증 치료약을 먹고 게임에 임한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에 '약쟁이'라는 누명을 쓰고 은퇴한다.


그리고 3년 후, 감독이 떠나 팀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한양체고 럭비부 감독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의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교장 정효(길해연) 외에는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고, 심지어 선수들마저 그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가람은 늘 통쾌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둘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


그가 아픈 기억과 함께 하는 리즈시절을 지나 당당히 나설 수 있었던 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 나는 가람의 말에서 그 답을 찾았다. 가람은 현종을 찾아가 한양체고 럭비부 선수들을 지켜봐 달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럭비는 동료들과 함께 하는 거라는 거 그걸 잊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해보려고 했던 결과가 지금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젠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애들에겐 함께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있어요." (6회)


이렇게 가람은 자신의 성공과 실패의 의미를 찾아낸다. 의미를 찾았기에 그는 '리즈시절'을 흘려보내고, 동시에 겪어낸 '최악의 시기'를 수용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9회 자신을 도와준 실업팀 선배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제 잘못이에요. 그리고 지나간 일이고요. 그래도 뭐 이렇게 도와주신다니 땡큐죠!"


이는 잘못을 인정하되, 이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리즈시절을 흘려보낸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문웅 아버지, 우진 어머니- 자신의 리즈시절을 자녀에게 투사


IE003515286_STD.jpg ▲우진의 어머니 소현은 자신의 선수생활을 딸 우진을 통해 연장하려 한다. SBS


반면, 리즈시절을 떠나 보니지 못한 인물인 문웅(김단) 아버지 철영(정기섭)과 사격선수 우진(박정연)의 어머니 소현(조연희)은 자신의 리즈시절을 자녀에게 투사한다.


주가람 이전 최고의 럭비스타였던 철영은 절정이던 시기, 무릎 부상으로 은퇴한다. 이후 시골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사는 그는 몸 좋고 운동에 재능이 있으며, 럭비를 좋아하는 아들 웅이 '럭비'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한다. 웅은 이런 아버지의 상처를 알기에 아버지에게 순종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양체고에 몰래 원서를 넣기도 한다. 가람은 이런 웅을 알아보고 철영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간다. 하지만, 인생을 망친 게 '럭비'라 여기고 있는 철영은 "재능 때문에 니나 내나 이 꼴 난 건 아니냐"며 웅에게 절대 대물림 할 수 없다고 말한다(3회).


그때 가람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럭비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요. 선배님도 나도 럭비를 잘못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난 거예요. 그러니까 책임을 럭비에 전가시키지 마시라고요. 선배님의 무릎도 저의 추락도 다 우리 잘못이지 럭비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만 좀 미워하세요."


이 말에 철영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화분 받침으로 썼던 럭비 메달을 다시 소중히 간직하며 자신의 과거를 수용한다. 그리고 웅이 럭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사격선수 우진의 어머니이자 역시 사격선수였던 소현은 자신의 '리즈시절'을 딸 우진을 통해 연장해 가려는 인물이다. 딸의 연습 기록지를 매일 챙기고 1등을 강요한다. 심지어 감독 낙균(이성욱)의 폭행으로 우진이 부상을 입었을 때에도 낙균의 잘못을 덮고 전국체전에 매진하라고 할 뿐이다. 이에 코치이지(임세미)는 어머니에게 "정말 위하는 사람이 우진인 것 맞습니까? 서우진 선수가 아니고요"라고 반문하지만 오히려 "선넘 지 말라"라고 화를 낸다(9회).


이는 자신의 리즈시절 떠나보내지 못하고, 딸을 통해 지켜내려는 소현의 욕망이 딸을 존중하기는커녕,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게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떠나보내지 못한 '리즈시절'을 자신의 자녀에게 투사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배이지 – 자신의 '쓸모'를 찾아서


IE003515287_STD.jpg ▲이지는 마침내 국가대표로서의 꿈을 떠나보내고 코치로서의 일에서 의미를 찾는다. SBS


한편 가람의 연인이자 사격 코치이지는 한국식 '리즈시절'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이지는 국가대표가 되기 직전, 연인이었던 가람이 사라지면서 크게 흔들린다. 결국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고 한양체고의 코치로 부임한 이지는 코치가 됐지만, '국가대표'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틈틈이 개인훈련을 한다. 그러면서 가람을 힘껏 원망한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주가람 때문이야!"라고(4회).


이런 이지는 사격부 감독의 폭력과 비리를 견뎌내면서 '입스(운동선수들이 평소 잘하던 동작을 할 수 없게 되는 현상)'를 겪는다. 이때 가람은 사격이 간절하다는 이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지금, 성적, 메달, 그것만 간절해." (7회)


이는 이지가 사격 자체보다 국가대표, 메달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과'에 집착하고 있음을 꿰뚫어 본 말일 것이다. 이 말에 이지는 사격을 잠시 쉬고, 정말 사격이 간절해진 순간에 입스를 극복한다. 그리고 사격부 감독 낙균의 폭력과 1등 만을 바라는 분위기 속에 힘들어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코치로서 아이들을 지키겠다 결심하며 '국가대표'의 꿈을 떠나보낸다. 가람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없으면 이 치사하고 더러운 꼴을 애들이 겪어야 될 것 같아서 조금 더 버텨보려고. 주가람처럼." (10회)


이는 이지가 '리즈시절'을 복원하려는 마음도, 가람에 대한 원망도 내려놓고, 지금 여기서의 자신의 쓸모를 찾아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리즈시절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서, 마침내 현재에서 더 가치 있게 살게 된 것이다.


"넌 몰라. 내일 당장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지)

"나도 그래, 나도 두려워." (가람)


6회 이지와 가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나는 이 대화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리즈시절'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고 이로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쓸모 있다'라고 느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생산성이 떨어질 때 종종 초라함을 느낀다. 가뜩이나 한국 사회는 '리즈시절'의 의미를 개인의 행복과 의미 있는 삶보다는 사회적인 인정과 성과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가 보여주듯 감독으로서의 가람의 삶도, 코치로서 이지의 삶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오히려 리즈시절을 내려놓지 못하고 성과에만 집착할 때 인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러니 이젠 '리즈시절'의 의미를 화려한 성과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매 순간에 두어보면 어떨까. 10회 가람의 말처럼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경험은 무조건 남을"테니 말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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