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탄구생활 126] tvN <서초동>의 문정
법무법인에 고용돼 월급을 받는 변호사로 일하는 '어쏘 변호사' 5인방의 이야기를 다룬 tvN <서초동>. 지난 10일 종영한 이 드라마는 안정적이지만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이 각자 맡은 사건을 통해 성장해 가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소위 '전문직'으로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직업'을 넘어선 '진짜 꿈'을 찾아가는 스토리가 잔잔한 감동을 줬다.
그중 내 마음에 가장 와닿은 인물은 끝까지 작은 로펌에 남은 문정(류혜영)이었다. 드라마의 어쏘 5인방 중 희지(문가영), 주형(이종석), 창원(강유석)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로펌을 떠나 각각 국선변호사, 개업변호사, 검사가 된다. 상기(임성재)는 오랜 꿈이었던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에 진학한다. 반면, 문정은 '임신'이라는 삶의 큰 변화 앞에서 주형이 떠난 그 로펌에 남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문정이 했던 고민과 선택들은 임신과 출산, 육아 앞에서 스스로를 포기하기 쉬운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문정이 자신을 지켜간 여정을 따라가 본다.
내 마음은 내가 정하는 것
문정은 '어쏘 변호사'의 일을 즐기는 편이다. 겉으로는 툴툴거리지만, 의뢰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고, 성심성의껏 의뢰인의 고충을 해결해 준다. 맛집 탐방도 좋아해 동료 변호사들을 식사 때마다 서초동의 맛집으로 안내한다.
이런 문정은 어느 날 식사 도중 메스꺼움을 느끼고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정은 참 침착했다. '임신은 축복'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기대어 섣불리 기뻐하지도 않고 동시에 임신과 일을 병행하기 힘든 조건들 때문에 쉽게 낙담하지도 않는다. 남편 지석(윤균상)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과 변화하는 몸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식사 도중 동료들에게 가장 먼저 임신 사실을 알린다. 그 후 임신으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며 같은 로펌에서 일하는 주형을 찾아가는데 주형이 "축복인데 왜 울상"이냐 묻자 이렇게 답한다.
"누구 맘대로 축복받을 일이야? 그 마음은 내가 정하는 거거든?" (6회)
나는 문정의 이런 태도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감정을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태도는 나다운 삶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어 문정은 자신에게는 '모성애'가 없을 것 같다고 고민한다. 그러자 주형은 이렇게 조언한다.
"너는 왜 꼭 모성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너는 그냥 원래도 사람 좋아하잖아. 욕을 좀 달고 살아서 그렇지. 네 아기도 사랑하겠지 그럼.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 꼭 모성애여야 해?" (6회)
남편의 함께하는 모습
아마도 주형의 이 말은 '모성애'를 고민하던 문정에게 해방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 후 문정은 매우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다. 지석이 과연 임신 소식을 기뻐할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지석은 임신 소식에 감동을 받고, 임신이 '문정만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임을 느끼게끔 행동한다.
입덧으로 잘 먹지 못하는 문정을 위해 문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하고, 발이 붓는 문정을 위해 슬그머니 한 치수 큰 신발을 사다 놓기도 한다. 육아휴직에 대한 고민도 문정보다 먼저 하고, 문정의 스케줄에 맞춰 육아휴직을 쓸 준비를 한다.
임신 과정 전체에 그리고 육아에 함께 하려는 이런 남편의 모습은 문정이 임신을 받아들이고, 일과 육아를 조화시킬 방법을 찾는데 크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지석의 지지 속에 문정은 '임산부 스티커'를 신청해 달고 다니며 자신이 '임산부'임을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밝히게 된다.
또한 지석은 문정이 육아휴직이 있는 기업으로 일터를 옮기지 않겠다고 했을 때조차 '아이는 어떻게 하려고?'라고 묻지 않고 "잘했어 정말 잘했어"라고 말해준다. 문정을 아이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지석의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맘 카페에서 얻은 힌트
하지만 결국 문정도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로펌 대표 경민(박형수)이 작은 로펌의 특성상, 대체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육아휴직을 주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경민은 문정이 그만둔다고 말하기도 전에 채용공고부터 준비해두기도 한다. 이에 문정은 육아휴직이 보장되는 대기업 사내 변호사로 이직할 준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송하는 일이 재밌고 적성에 맞음을 깨닫고는 과감히 박찬다. 동시에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주지 않는다면 역시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런 문정에게 '자신을 지키는 길'을 열어준 것은 '선배 엄마'들이었다. 문정은 온라인 맘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서 방법을 찾아낸다. 맘 카페에서 '대체인력'을 직접 구하고 육아휴직을 쓰는 엄마들의 글을 발견한 것이다. 실제로 대체인력으로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변호사 엄마들이 있음을 알게 된 문정은 이들에게 연락을 취해 이력서를 받아 들고 당당히 대표에게 가서 말한다.
"대표님이 못 구하신 게 아니라 안 구하셨던 대체인력들 이력서요. 해보긴 뭘 해봐요. 다 알아서 나가줬겠죠. 근데 저는 못 나갑니다. 아니 안 나가요. 제 권리인데 제가 왜 나가요? 이 중에서 현실적으로 고르시면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딱 맞게 제 자리에 와 주시겠다고 하는 분들입니다." (12회)
이렇게 문정은 임신과 출산, 육아 앞에서도 자신이 정말 행복해하는 일을 함께 할 방법을 찾았다. 여기에는 편견 없이 봐주는 동료들, 진심으로 함께하고 행동하는 남편, 그리고 육아 동지 엄마들의 연대가 함께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지켜낸 문정 덕에 문정이 일하던 작은 로펌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고 그 뒤에 오는 여성 변호사들의 상황도 보다 나아질 것이다. 마지막 회 로펌 대표들이 '어쏘 변호사'들의 퇴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 회사는 나가는 사람 없냐"는 물었을 때 경민이 당당히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왜 나가요? 육아휴직 쓰면 되지. 대체하실 분도 이미 다 구해놨어요." (경민)
지금도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지켜가는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응원한다. 이들이 스스로를 지키며 낸 길은 분명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길을 열어주고, 사회에 작은 변화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믿는다. 문정이 해냈듯이!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