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06 <처음, 김민정> 리뷰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은 텍스트를 매개로 텍스트 안팎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텍스트클럽의 관객, ‘텍스트클러버’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창작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일방향의 경험이 '읽고 나누는' 쌍방향의 입체적 경험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 우주
사진 |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시즌 1의 두 번째 시간! 김민정 시인님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복간을 기념하며 성장과 발전의 시작점인 ‘처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는 오랫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시집을 다시 묶어 세상에 선보이는 시집 시리즈입니다. 김민정 시인님의 첫 시집을 바탕으로, 당시의 첫 마음과 지금 여기에서 돌아보는 첫 마음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김민정 시인님과 함께 ‘첫' 순간을 누린 여섯 번째 텍스트클럽, 지금 시작합니다.
내 처음의 첫 시집.
누가 볼세라 (누구 봐줄 사람도 없었지만) 출력하여
누런 서류봉투에 죄다 넣어서는 어딜 가든 들고 다녔던 한 묶음의 시들, 시절들.
흘림 없이 빠짐없이 여기에 둔다. 이 밖에 나는 더는 없을 것이다.
-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시인의 말에서 발췌
유희경 시인 (이하 ‘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가 드디어 복간되었습니다. 어떠신가요.
김민정 시인 (이하 ‘김'): 2005년에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가 나왔을 때, 시집 편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였어요. 되게 부끄러웠고, 제 시집인데도 이번에 다시 만들기 전까지 다시 들춰볼 수가 없었어요.
들춰보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어떻게 시를 썼는지 제가 알잖아요. 1995년도,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썼던 기록인데요. 그 10년은 머리로 떠올려도 힘든데, 기록을 본다는 건 그 시절을 관통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이번에 교정지를 보면서 다시 그 시절의 언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좀 짠하게, 이때의 저를 안아주게 됐어요. 처음이었어요.
사실 그때는 쓰는 것 자체는 용감했어요. 지금은 봐주는 사람을 의식하지만, 그때는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 시절의 맑음이나 목적 없음이 느껴지더라고요. 사람이 ‘목적 없음’ 만큼 투명할 때가 없잖아요. 선연함이 남아있어요.
유: 그 시절의 나를 안아줄 수 있다는 게 멋있어요.
김: 내 잘못이 아닌데 다 내 잘못으로 돌리는 어린 날이 있잖아요. 그때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 싸우는 방법도, 대처하는 방법도 몰랐고, 그저 빨리 덮어버리려면 ‘내 탓이오’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이 시집을 다시 보니까 뒤끝도 있더라고요. 20~30대에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어도 기록을 많이 하시면 좋겠어요. 기록만이 나를 증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을 쓰려고 문창과에 입학했던 김민정 시인님은 세계 시인선을 접한 이후 ‘시의 언저리에 있고 싶다'라는 생각을 다졌다고 합니다.
김: 대학교 1, 2학년 때 읽었던 시집의 내용이 저한테 왔어요. 내 몸이 탁 걸리는 느낌. 처음으로 그런 걸 느껴봤어요. 누구나 많이 읽는 시는 재미없었고, 세계시인선을 많이 봤죠. 틀이 없으니까. 저한테는 ‘미역국은 이 그릇에 담아’ 같은 틀이나 규칙이 너무 싫었어요. 오이소박이를 대접에 담으면 어때요. 그런 사고의 전환을 세계시인선이 많이 알려줬어요. 예를 들면 실비아 플라스 같은 시인이요.
그리고 그 무렵부터 그림을 보기 시작했죠. 제 시에서 나오는 폭력적인 느낌이나 어떤 상황을 그림은 딱 한 컷으로 보여주잖아요. 그런 것들이 시의 꿰뚫림과 비슷한 것 같아요. ‘시인이 안 되어도 좋다. 나는 이 언저리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고, 학점이나 등단을 포기하고 ‘내 맘대로 쓰는 것’을 시작으로 1996년도부터 열심히 시를 썼어요.
선생님들이 ‘네가 쓰는 시는 시가 아니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속으로 오기가 있었어요. 제가 봐도 제 시는 신문에 실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투고를 해봤어요. 99년도에 <작가세계>에 원고를 보냈고, 퇴근길에 ‘최종 3인에 들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때 ‘아, 내가 행동이라도 해야 내가 (무엇이라도) 가질 수 있는 거구나.’는 걸 알게 되고 용기를 냈었죠. 이후에 <문예중앙>으로 등단했어요. 당시 전통이 당선자에게 전보를 보내는 것이었는데 이름이 ‘김만정’으로 왔더라고요. (웃음)
유: 등단 이후 첫 시집이 나왔을 때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김: 문학 신문에 젊은 시인이 나오는 예가 별로 없었어요. ‘이렇게 시를 쓰는 친구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라는 기사가 나왔어요.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상한 시를 쓰는 애들로 취급했었죠. 예전에는 문학평론가 선생님들이 저한테 ‘시 이렇게 쓰지 마.’ 하셨어요. 받아칠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도 아쉬워요. (웃음)
그 무렵 최승호 선생님께서는 “너를 가지치기하려는 정원사를 죽여.”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때 저는 첫 시집을 어떻게 만들지 몰랐어요. 그래서 저랑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 (편집 일을 할 때) 온몸을 던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낯선 것이 나오면 일단 들어줘야 하는데, 예전엔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문학 하는 데에 뒤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누가 시가 길다고 하면 집에 와서 여섯 장씩 썼어요. (웃음)
어쨌든 한국 사람들처럼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아직도 (독자 분들이) 시를 너무 좋아해서 감사해요. 너무 신기해요. 지금은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 시절이 온 것 같아요.
몇 군데 작은 칼질을 당한 그녀가
몇 개의 작은 칼날을 부득부득 씹어 삼키고 있어요
- "응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15쪽
김민정 시인님은 시인이면서 시집을 탁월하게 엮어내는 편집자로도 유명합니다. 문학을 다루지 않았던 출판사에서 시인선을 꾸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약 150 여권의 시집을 책임지는 대표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편집자로서의 ‘처음'도 살짝 나누어 보았습니다.
유: 편집자로서 기억에 남는 첫 시집이 있나요? 첫 시집이라는 것은 개인에게도 중요하지만 시라는 장르, 또는 장(場)으로서의 시가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으려면 좋은 시집이 나와야 하더라고요.
김: (남들은) 시집 만드는 일을 왜 저렇게까지 붙들고 욕심껏 하고 있지, 싶을 거예요. 저는 나 스스로 공부가 되어서 좋아요. 장점을 찾으려고 해서가 아니고 저절로 그 시집, 그 시인의 장점이 보여요. 예쁘고 건강한 것이 보이고,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A는 이래서 좋고, B는 이래서 잘 됐으면 좋겠고, 싶죠. 지루하거나 매너리즘 없이 매번 새롭죠. 제가 새것 좋아하거든요. 제일 먼저 갖고 싶고, 제일 먼저 알고 싶고요.
첫 시집에 호기심과 애정이 유독 많아요. 과할 정도로. <문예중앙>에 근무할 때는 제가 시집 에디터를 경험한 적이 없고, 배워본 적이 없어서 제 몸을 완벽하게 던지지 못했어요. 그런데 문학동네에서는 경험이 있으니까 완전히 다이빙이 되더라고요. 신나죠. 미친 짓인지 아닌지 계산할 수가 없어서요. 어떤 시인은 11, 12교도 봤어요. 문학동네 시집 에디터로서 첫 시집과의 본격적인 대면은 박준, 신철규, 민구, 박새미 시인이고 사실 더 많죠.
유: 김민정 시인은 제목 잘 짓는 분으로도 유명하죠.
김: 저는 어디에 가서든 ‘시란 무엇인가’라는 얘기를 할 때 ‘배가 산으로 간다’는 정의라고 생각해요. 제목에 대해서는 문학에 대한 정의를 한 줄로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다 읽은 책도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제목은 남으니까요. 문학이 뭐지, 시가 뭐지, 이런 정의를 각인시킬 수 있다면 독자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유: 첫 시집에서 내가 되찾을 수 없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김: ‘순정’이겠죠. 그때는 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순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유: 시집을 다시 한번 읽었는데, 예전에 읽었을 때의 벅참이 다시 오더라고요. 시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김민정 시인의 이 시집이 저한테는 특히 그래요.
김: 원래 열림원에서 나온 초판 시집은 오십몇 편이었고, 부(部)도 지금과 달라요. 시집을 다시 내려고 보니까, 그때 같이 묶지 못했던 시가 생각났어요. 98년에 그 당시 편집자한테 보냈던 시가 남아있었더라고요.
시를 쓸 때는 용기가 있었는데 막상 나온다고 하니 겁이 난 거예요. 원래 발표했던 것들을 묶어서 보냈는데, 교정지 받았을 때 무서워서 수위 조절을 했어요. 조금이라도 (저를) 덜 들키고 싶었어요. 그때는 눈 가리고 아웅을 했던 거죠. 이번에는 복원을 했어요. 제가 A4 몇 장짜리 시도 발표 했었는데 읽는 사람을 고려해서 쪼갰던 것도 복원했어요. 정직한 방법으로요.
끓는다, 들끓는다, 잠잠 들개 소리, 그 너머로 나는 아니랬잖아 앙다문 잇사이에 꼭 쥔 주먹처럼 성글게 끼어 있던 까만 들깨 한 알, 그래 그 점 하나 마침표.
- "들개 브라보 들깨",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140쪽
첫 번째 사연은 김민정 시인님의 첫 시와 시를 쓴 계기를 묻는 사연이었습니다. 사연을 쓴 텍스트클러버는 첫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선물 받았다고 합니다. 사연을 읽고선 ‘들개 브라보 들깨'를 낭독해주셨고, 들기름 막국수를 선물로 건네주셨습니다.
두 번째 사연을 다룰 즈음에는 시인님의 깜짝 선물이 공개되었습니다. 모든 텍스트클러버를 위해 편지와 복주머니를 준비해주셨습니다. 두 번째 사연이 ‘첫 기억’과 ‘지금'을 담고 있었고, 기억을 잊고 지금을 충실하게 살고 싶다는 내용이라 꼭 전해주고 싶었다며 선물을 고르고 준비하게 된 이유를 나눠주셨습니다.
김: 매 순간이 처음이잖아요. 매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면 될 것 같아요. (대부분 기억은) 저절로 잊히잖아요. 처음이 끝이 될 수밖에 없어요. 계속 기억이 밀려나고 있기 때문에. ‘잊어야지’, ‘기억해야지’가 아니어도, 그냥 두더라도 밀려나요.
제가 두 번째 사연을 보고, 덕분에 여러분께 편지를 쓸 수 있었어요. 처음 만난 모두에게 줄 수 있게 선물을 마련했어요. 두 번째 텍스트클러버가 아니었다면 생각 못 했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2021년 5월 13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만난 여러분들에게
무언가 드릴 수 있음이 저에게는 처음입니다.
(...)
2021년 5월 13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처음,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였던 여러분들에게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였던 처음, 김민정 드립니다.
습작 중인 텍스트클러버는 '때'에 관한 질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적당한 ‘때'를 언제,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인지 묻는 말에 김민정 시인님은 ‘몸을 관찰하라'는 답변을 돌려주셨습니다.
김: 목적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몸이 경직돼요.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에, 몸도 그렇게 하는 것이죠.
내가 세상에 던져지든 뻗쳐지든,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뭔가를 해내기 위해서, 혹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고요.
자기 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 답이 나와요. 뭔가 차오르면 누가 ‘시집을 왜 냈어.’ 하기 전에 내요. 시를 갖고 싶다고 생각할 때, 시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스스로 ‘그만큼 썼냐’고 물어보면 내가 알아요. 몸이 알아요. 내 몸과 대화하지 않으면 망설이게 돼요. 자문자답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면 이미 하고 있을 거예요.
차올랐다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라고 전환이 되는 거죠.
유: 사연 보내주신 분은 차오른 것을 본인이 못 알아볼까 봐 걱정인 것 같아요.
김: 제가 급작스럽게 투고를 하고 등단을 하게 된 것도, 정채봉 선생님의 ‘시 쓰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는데요. 저를 잘 알지 못하는 분이었는데도 그 한마디를 듣고 (노트를) 뒤적이니까 시가 나왔어요. 망설였으면 놓쳤을 거예요. 전철 탈 때마다 한 편씩 퇴고를 시작했어요. 퇴고하면 화이트가 두껍게 쌓이는데, 산처럼 쌓였을 때 더는 못 칠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때 그만 고쳐도 되나보다, 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내 몸을 움직여서 행하다 보면 알게 되는 때가 있어요. 지금 나에게는 최상이다 싶은 거죠.
유: 오늘 긴 시간 이야기 나눠보았는데, 어떠셨는지 소감을 들려주신다면요.
김: 첫 시집은 ‘이런 단어가 있었지’를 각인시켜주는 시집이에요. 제가 낭독할 때 발음을 깍두기 썰듯이 한 이유가 있어요. 국어사전을 가장 많이 봤을 때의 시집이거든요. 우리말이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그런 생각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첫 시집인데 이제 와서 뭘 하려니까 더 오금 저리고 걱정되더라고요. 여러분들의 귀한 돈, 시간에 대한 값어치를 못할까 봐 두려움과 공포가 많았고요. 그런데 준비하면서 행복했던 것 같아요. 좀 더 말이 되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 충만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를 메모하게 됐고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했던 것이 저에게는 참 차오르는 시간이었어요.
저녁 시간대에 열리는 행사라서 떡까지 준비해주셨던 김민정 시인님.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텍스트클러버의 양손이, 마음이 그득하게 불렀습니다.
텍스트클럽 시즌 1은 ‘변화’를 다룹니다. 변화 그 자체보다는 변화하는 흐름 속, ‘변하지 않는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을 때, 빠르게 대처하는 한편 대처의 목적과 의미를 다시 한번 면밀히 점검해보는 것처럼 말이죠.
변화를 가능하게 한 시작, 처음, 본질적 의미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의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변화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언제나 있었으니까요.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복간을 기념하며 만난 당신의 처음이 내내 차오르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