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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붐 Mar 09. 2020

#1 산티아고 순례길 - 첫 발걸음을 내딛다

첫날 산맥을 넘는다고요?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아침 7시가 되자 일제히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 둘 침대에서 일어나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향한다. 나 역시도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대망의 순례길 첫날, 드디어 오늘 순례길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설레기도 하면서 걱정되기도 한다. 설레는 이유는 명확한데 걱정되는 이유는 막연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걱정되는데?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없다. 나도 내가 왜 걱정스러운 마음을 갖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설레는 마음 뒤편에 심란하고 걱정되는 마음도 있다. 왜일까.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어서 일까? 아님 한국에서 했던 국토대장정의 트라우마?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전날 아침식사를 신청했기 때문에 C와 J와 함께 아침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옷을 갖춰 입고 배낭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평소 한국에서도 등산을 즐겨하지 않았기에 배낭을 멘 나의 모습과 등산복을 입은 나의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순례길을 걸을 때 따가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등산모자가 필수라 하였기에 한국에서 등산모자도 준비해 왔다. 이 등산모자를 가방에 넣어야 하는지 가방에 걸어야 하는지 아님 목에 걸고 언제든 쓸 수 있게 준비를 해놓아야 하는지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일단은 C와 J를 따라 모자를 목에 걸고 식탁에 앉았다. 수프를 먹으려 고개를 살짝 숙이니 모자가 스르르 내려왔다. 거참, 걸리적거리네.라고 생각하며 목에서 풀어 식탁 옆에 모자를 올려두었다. 이 사소한 것 하나도 참으로 어색하고 낯설구나. 

출처 - http://bitly.kr/vhlrKtW0

빵과 수프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 후 C와 J와 함께 우리의 첫 알베르게를 나섰다. 알베르게의 호스트인 중년의 아주머니는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우리를 한 명 한 명 안아주었다. 드디어  30일간 여정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아직 첫날의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순례길로 인한 인생의 변화가 느껴지는 듯했다. 주위 풍경도 살피며 아직은 어색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C와 J와는 처음부터 격차가 벌어졌다. 보폭과 스피드가 나와는 달랐고 무리해서 그들에게 맞추진 않았다. 순례길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 하였다. 30일간의 기나긴 순례길을 걸을 때 각자만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이 걷는 누군가에게 내 계획을 맞추다 보면 나의 목적이 흐려질 수도 있다. 순례길에 오기 전 이미 순례길을 걸은 수많은 선배님들의 수기를 읽어봤는데 대부분이 비슷한 말을 하였다. 남에게 나를 맞추지 말고 나의 계획과 목적에만 집중하라고. 그 첫 번째가 같이 걷는 이가 빨리 가든 목적지는 한 곳이기에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함께 알베르게를 나선 지 5분도 안돼 격차가 벌어진 C와 J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며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의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겨 홀로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Excuse me?' 뒤를 돌아보니 한 외국인 여성이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 길로 가는 게 맞냐고 물었다. 나 역시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지 5분도 안된 순례자로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지 알 순 없지만 드문드문 나와 같은 행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라고 말을 해주었다. 자연스레 보폭을 맞추며 통성명과 간단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온 V는 호텔에서 근무하며 2주간의 휴가를 받아 순례길을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산티아고까지가 아닌 부르고스까지만 걸으며 부르고스에서 산티아고까지의 길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걷는다고 하였다. 순례길을 걸으며 V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800KM의 순례길을 한 번에 걷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나눠서 걷는 이들 말이다. 그리고 순례길을 두, 세 번째 많게는 네 번째 순례길을 걷는 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V와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한창 얘기에 빠져있던 중 주위를 보니 순례자가 한 명도 없었다. V 역시 이상함을 감지하고 갖고 온 종이지도를 살펴보았다.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주위에 다른 순례자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주위는 고요했다. 어느새 길에는 나와 V밖에 없었다. 우리가 허둥지둥하며 혼란에 빠져있을 때 한 외국인이 다가왔다. 순례자인 것 같진 않았고 아마 그 동네 주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었다. 부엔 까미노라는 말과 함께. 반신반의하며 동네 주민이 알려준 길을 한 20분쯤 걸었을까. 다행히도 다른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V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근처 슈퍼마켓에서 요기할만한 것을 샀다. 


순례길에 오기 전 최소한의 정보만을 찾아봤다. 종종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만 찾아봤을 뿐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서적은 일절 찾아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길 바랬다. 혹시나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반감될 수 있으므로. 그래서인지 나만 빼고 다 알고 있더라. 점심을 먹으며 V와 얘기를 나누는데 좀만 걸으면 피레네 산맥이 나온다고 했다. 먹던 샌드위치를 뱉을 기세로 너무 놀라 V에게 다시 물었다. "산맥을 넘는다고? 오늘?" 나의 물음에 V는 이렇게 답했다.  "응 우리 산맥을 넘잖아 오늘.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내가 알기론 오늘이 제일 힘든 날이라던데?" 그렇게 점심을 먹으며 우리가 이제부터 걷을 길이 가장 힘든 길이란 걸 알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오히려 첫날부터 힘들 줄 알았으면 전날부터 걱정을 했겠지. 오히려 잘된 거라 생각하고 점심식사와 함께 잠깐의 휴식을 갖은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며 새로운 친구를 한 명 더 사귀었다. 체코에서 온 R이었다. 배낭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그 조그마한 체구에 배낭 무게는 11kg이라고 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참 궁금했다. 일단 그녀는 순례길에 대한 책을 가지고 다녔다. 가이드 북 같은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 아무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와 이탈리아에서 온 V 그리고 체코에서 온 R는 함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산맥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3월까지는 눈 때문에 기존의 길을 우회하는 길만 개방되었다는데 V의 말로는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더 수월한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길도 전혀 수월하지 않았다. 경사는 어마어마했고 엎친데 겹친 격으로 눈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우의를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눈비를 다 맞아가며 미끄러운 산을 타야 했다. 배낭은 물론 입고 있는 옷과 그 안의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추위에 덜덜 떨며 4시간 정도를 걸은 것 같다. 속으로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골백번도 포기하고 도망갔다'라고 수없이 외치며 그래도 이 길의 끝은 있겠지, 좀만 더 걸으면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겠지'라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얼이 빠진 채 땅만 보고 걸었다. 그러던 중 내가 갖고 있던 유일한 방한용품이 생각이 났다. 배낭 깊숙이 넣어두었던 장갑. 걷던 길을 멈추고 배낭에서 장갑을 꺼냈다. 그 순간 V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은 주머니에 한 손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손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왼손의 장갑을 벗어 V에게 건넸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내가 어서 받으라며 보채자 V는 장갑 한 짝을 받아 자기 손에 꼈다. 그렇게 V와 나는 사이좋게 장갑을 한 짝을 나눠 끼고 눈비를 맞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함께 넘었다. 이 에피소드로 V와 나는 조금 더 가까워졌으며 따뜻하고 애틋한 무엇가를 함께 나누게 되었다. 뭘 보고 그랬는지 서로가 힘들어 보이면 거의 다 왔다며 희망고문을 하며 서로 밀고 끌어주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우리의 목적지 론세스바예스에 도착을 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순례자 여권에 첫 알베르게 도장을 받고 간단한 안내사항을 듣고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가는 길에 아침에 헤어진 C를 만났다. 추위에 덜덜 떨며 눈비에 젖은 생쥐꼴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C는 고생했다며 어깨를 몇 번 두들겨주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배정받은 침대에 짐을 놓고 서둘러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순례자들에 비해 늦게 도착한 탓에 따뜻한 물을 이미 다 써버려서 우리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샤워기를 트는 소리와 함께 꺅꺅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며 찬물로 무사히(?) 샤워를 마쳤다. 침대로 돌아와 한국에서 미리 챙겨 온 감기몸살약을 먹었다. V에게도 권하니 V도 한알을 집어삼켰다. "오늘의 고생으로 감기 몸살이 안 걸리는 것이 더 이상할 거야"라고 우스갯소리와 함께. V와 R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었다. 생장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대부분이 론세스바예스가 첫날의 목적지일 것이다. 그리고 론세스바예스에는 오직 하나의 알베르게밖에 없다. 그 알베르게는 깊고 깊은 산골의 어떤 산장처럼 알베르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저녁을 먹고자 한다면 알베르게에 따로 마련된 레스토랑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먹어야 한다. 

 자연스레 오늘 출발만 같이 한 C와 J와 그리고 다른 순례자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순례자 메뉴는 정말 훌륭했다. 오늘의 고생을 다 잊게 만드는 맛이었다. 자연스레 오늘 첫 순례길은 어땠는지 서로의 소감을 물었다. 다들 그럴싸한 소감을 내놓았는데 나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첫날의 소감을 말했다. 산을 넘으며 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고. 여기가 스페인이라 다행이다. 만약 한국이었음 나는 애 진작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이 말에 C와 J 그리고 다른 순례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C와 J는 그래도 대견하다. 고생했다. 잘했다며 나를 다독여주고 제일 큰 산 하나 넘었으니 이제 괜찮을 거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그렇게 하나의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 유쾌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C와 J와 함께 알베르게 주변을 산책하였다. 알베르게 주변에는 하루 종일 내린 눈이 쌓여있었는데 갑자기 J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눈 위를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러냐며 정신 차리라며 농담을 주고받길 5분째. 어느새 나 또한 슬리퍼를 벗고 J를 따라 하고 있었다. 참 재밌는 사람들 그리고 재밌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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