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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슴 Apr 13. 2024

혼잣말


자국을 생각한다.

세상 곳곳에 자국이 가득하다. 오늘 나는 몇 개의 자국을 보았는가.

누군가 접었던 책 귀퉁이에 남은 자국을 생각한다. 다시 펼치더라도 접힌 적 없었던 때로 되돌아갈 수 없는, 약하지만 결코 사라질 수 없도록 패인 선을 생각한다. 그 선은 색이 없으나 분명히 색이 있는 그림자를 닮았다. 빛 아래서 보이고 어둠 속에선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쳐서 마음 귀퉁이가 접혀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떠오른다.     


얼룩을 생각한다. 

한 번도 침범 당하지 않은 영토가 없는 것처럼 세상에 얼룩지지 않은 것은 없다.

아침마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으며, 잠시간 머문 손가락의 땀과 기름으로 남은 지문 위에 내 손을 겹쳤던 사실을 떠올린다. 내일도 오늘처럼 지하철 손잡이를 잡겠지만 어제와 같은 손잡이는 아닐 것이다. 얼룩은 닿을 수 있지만, 잡을 수는 없다.     


흔적을 생각한다.

세상은 누군가 남기고 간 흔적 투성이다. 나는 흔적을 남기면서 늙어가고, 세상은 흔적으로 낡아간다.

자주, 또 오랫동안 앉아서 엉덩이 자리가 패인 방석을 생각한다.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있었던 과거를 거기 얹은 채로 자리 위에 놓인 방석을 생각한다. 남겨진 자리에 공백을 더해 흔적을 기억한다. 닳고 닳도록 오래 찾았던 사람의, 이제는 빈자리를 생각한다.      


누군가가 놓치거나, 혹은 잃어버려서 홀로 남겨진 분실물을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주인이 사라진 물건. 주인이 사라졌다고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인 잃은 물건은 오히려 미아에 가깝다.      



그렇게 남겨진 사랑을 생각한다. 

떠나간 사람의 반대편에 서있는 남은 사랑을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남아 늙어버린 사랑을 생각한다. 

다 전하지 못해서 위장 언저리에 체한 듯 남은 사랑을 생각한다.     


소진될 수 있어서 축복받은 사랑을, 어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랑을, 마음을 접고 접혀본 사랑을, 흔적과 얼룩이 차마 닦이지 않는 사랑을 생각한다. 

영원히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사랑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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