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서재: 샤먼 앱트 러셀 《배고픔에 관하여》
최근 몇 달간 나는 자주 과잉 상태에 머물렀다. 새삼 내 상태를 자각하게 된 이유는 박상영 작가의 한 연작소설 때문이다. 이 작가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던 걸까. 각각 다른 시기에 발표한 단편소설일 테지만 한 권으로 묶어놓으니, ‘자의식 과잉도 병’이라는 문구가 반복되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띈다. 그렇게 자주 보이는 ‘과잉’이라는 단어에서 내 모습이 언뜻 비쳐 보였다.
나는 유난히 음식에 집착한다. 그만큼 걸핏하면 과하게 섭취하는데, 한번 식사를 시작하면 (그 메뉴가 그날따라 더 맛있게 느껴진다면) 더는 다른 음식을 쳐다도 보기 싫을 때까지 먹었다. 어렸을 적에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경쟁하듯 음식을 먹어치운 기억 때문일까. 포만감에 도취한 사람처럼. 배가 불러오는 감각을 만끽하며 음식을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중도는 참 멋진 미덕이지만, 나에겐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는 공허에 가까웠다. 무난한 상태는 자극 없이 무미건조할 뿐. 이건 뭐, 밥을 먹은 건지 아닌지 모를 찜찜한 기분마저 들었다. 자고로 ‘밥’은 포만감을 지나 정신까지 뻗쳐오는 약간의 나태함까지 찾아와야, 비로소 한 끼를 잘 먹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식이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받을 수 있는 보상이라도 되는 듯이 식사라는 행사를 치렀다. 오랜 기간, 포만감(으로 위장한 과잉)은 선이요, 허기와 배고픔은 악이었다.
언제 이런 책을 샀더라. 책장에 얌전히 꽂힌 《배고픔에 관하여》.(이 책은 배불리 음식을 탐한 적 없는, 소식하는 구도자가 떠오르는 회색빛이다) 출판정보를 보니, 2016년 4월 초판 1쇄 발행. 2016년, 나는 왜 배고픔에 관해 알고 싶어 했을까. 지금과 같은 이유일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가 보다. 배고픔과 친해져 봐야지. 아니, 친해지는 건 어려울 테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장수의 비결은 소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마음으로 책장에서 매실액처럼 진득이 묵혀가던 책을 펼쳤다.
340페이지. 배고픔에 관하여 무슨 할 말이 이렇게나 있을까 싶지만, 단순히 굶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 현상부터 종교적 단식, 투쟁으로써의 단식, 그리고 전쟁이나 기근 같은 비극 속의 배고픔, 오랜 기근을 겪은 피해자들의 회복 과정 등 세상의 다양한 배고픔을 다루었다.
돌이켜보니 과잉은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마자 잠에서 깨겠다는 변명으로 스마트폰부터 찾는다. 손에 쥐고 습관처럼 손가락을 움직인다. 나쁜 버릇처럼 짧은 콘텐츠를 낭비한다. 인스타그램은 시시각각 공유된 타인의 일상을 전시하고, 누군가 올린 시시껄렁한 농담들로 넘쳐흐른다. 화장실에 갈 때도, 지하철을 기다릴 때도,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아니, 반대로 스마트폰을 놓고 있을 때가 보통 언제더라.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현재를 생생하게 느끼는 선명한 정신이 생소하다. 과유불급을 체감하는 순간. 나는 왜 집착하는가. 내가 본 몇 초짜리 콘텐츠들은 내 속에서 무엇이 되려고. 매일 보는 10초짜리 이야기들을 건강하게 흡수하고 배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 몸속 어디선가 서로 뭉치고 얽혀 말썽을 일으키고 말까.
보이는 대로 차려진 대로 먹기에는 쉽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멈추기는 힘들다. 주어진 대로 보는 것보다 스스로 읽을 것을 선택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자기를 구성하고 재구성해 나가려면 세상을 끊임없이 탈바꿈해야 한다. 우리는 물질을 덩어리째 섭취해서 잘게 쪼개고, 더 잘게 부수어서 포도당 분자나 지방산으로 바꾸고, 또다시 더욱더 잘게 부수어 세포에게 필요한 에너지로 바꾼다. 우리는 세상을 해체하고 새로 세우면서, 조직과 뼈대를 창조하고, 행동과 생각을 창조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거듭거듭, 세상을 허물고 다시 건설하기 위해 생각을 사용한다.
(37쪽, 샤먼 앱트 러셀, <배고픔에 관하여>, 2016)
긴 시간을 들여 작물을 온전히 길러낸다. 배가 고파온다. 에너지를 쏟아 요리를 완성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기는 내가 된다. 완성된 것을 입에 넣고 치아와 침으로 다시 부수고 쪼갠다. 부서져야 흡수될 수 있다. 내 식으로 파괴해야, 그제야 내 것이 된다. 해체와 창조의 반복. 아마도 음식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먹는다’라는 것. 내가 그동안 먹어온 것은 음식인가, 아니면 배고픔으로 둔갑한 다른 마음일까. 나는 진정한 의미로, 무엇이든 ‘잘’ 먹었던 적이 아주 적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