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씨앗 밖으로 나오려는 생명을 너그러이 받아주는 넉넉한 계절.
무거운 여름처럼 혹독하지도, 짙은 가을처럼 열매를 바라지도 않고. 싹을 틔우기만 해도 좋다고, 그저 시작하기만 해도 괜찮다고 따사로운 온기로 다독이는 계절이 왔다. 서랍을 뒤져 겨우내 숨겨두었던 씨앗 주머니를 찾는다. 기다렸던 약속처럼, 봄이 오면 틔울 싹을 만나기 위해서.
여름이 좋아서 봄을 더 기다린다. 크리스마스 전날, 이브를 더 반기는 마음으로.
여름은 쉽게 미움받는 계절. 하지만 나는 여름 한낮의 태양을 사랑한다. 나는 지독한 더위를 사랑의 열병처럼 앓는다. 살갗을 태우니 자꾸만 마음이 끓어오른다. 한계에 다다른 주전자에 물방울이 튀어 오르듯이, 꾸역꾸역 이마 끝에 솟아오르는 땀방울을 닦으면서 나 자신이 물로 가득 찬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윽고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온다. 여름을 놓아줄 때가 온다.
겨울에 봄을 꿈꾸며 산다. 손발이 찬 사람에게 겨울은 통각의 계절이다.
매년 아프게, 튼 살을 문지르며 겨울을 난다. 일찍이 돌아서는 해가 아쉽고, 쉽게 저무는 하루는 추위만 남기고 떠난다. 내게 겨울은 고요하기보다 적막하고, 평온하기보다 고독하다. 겨울 한가운데서 추위를 견디며 더위를 바란다. 지난겨울, 사랑하는 강아지를 보내고 몸속 어딘가에 구멍이 생겼다. 휘잉, 구멍에 바람이 맴돌 때마다 시려워 울고 따가워 울었다. 추운 날, 꽁꽁 언 마음으로 한동안 웅크려 지냈다. 겨울잠도 자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이불 속에 있었다. 상처를 한동안 핥아야 하는 병든 동물처럼. 나는 도무지 겨울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봄이 왔다.
칼바람이 생채기를 내고 간 자리에 둔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인다. 그늘진 마음을 조금씩 밀어내듯이 해가 점점 길어진다. 인생에서 좋은 나날을 비유할 때 말하는 시절, 꽃 같은 계절이 왔다. 다른 계절보다 짧아서 더 귀한, 손님 같은 봄. 봄은 알아차려야 한다. 맨발로 마중을 나가듯이. 벌써 왔냐고,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한 것처럼. 미리 알아채지 못하면 반가울 새도 없이 떠나고야 마니까.
행복한 시절은 지나갔지만 봄은 온다. 봄은 가지만 기어코 봄은 또 온다.
강아지를 떠올릴 때마다 자꾸 벌어지는 상처가 견딜만한 봄이 왔다. 꽃을 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