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리터러시는 들어봤지만, 비주얼 리터러시는 처음이라면
혹시 데이터 리터러시(Data Literacy)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현재 IT 기업에서 일하다 보니 저는 꽤 자주 들어본 말입니다. 데이터 리터러시는 '데이터를 읽고 거기에 담긴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특히 디지털이나 온라인 기반 기업에서는 필수로 요구되는 역량이기도 해요. 홈페이지 방문자나 구매자가 온라인상에 남긴 여러 데이터(방문 수, 구매 경로, 이탈률 등)를 뜯어보고 분석할 줄 알아야 비즈니스 전략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 예술경영 관련 책을 읽다가 비주얼 리터러시(Visual Literacy)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어요. 데이터 리터러시를 알고 있다 보니 엄청 생소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숫자나 데이터가 아닌 '시각적인 이미지를 이해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이 단어가 예술을 좋아하는 저에게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이 단어를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비주얼 리터러시는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였어요. 그리고 평소에 나는 어떻게 비주얼 리터러시를 키워왔는지도 함께 고민해보게 되었어요. 이번 글은 제 고민을 바탕으로 비주얼 리터러시에 대한 저만의 생각과 키우는 방법(의식적으로 키우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생길 틀)을 소개하고자 해요.
비주얼 리터러시는 시각적 이미지를 1) 이해하고 여기에 2)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해’는 객관적인 영역으로, 예술 창작자가 의도한 것 혹은 예술 작품이 놓인 사회적/역사적 맥락 등을 파악하는 능력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면에 ‘의미 부여’는 관람자인 나의 고유한 느낌이나 생각을 작품에 더할 수 있는 주관적인 영역이라고 봤어요. 1)과 2)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비주얼 리터러시를 충분히 갖췄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예술 작품을 볼 때 비주얼 리터러시가 왜 필요할까요? 사실 1년에 두세 번 정말 가-끔 예술을 소비한다면 필요한 능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술을 꾸준히 즐기고 싶거나 전시 관람에 재미를 붙이고 싶다면 꼭 길러야 하는 능력이에요. 작가가 의도한 것과 작품이 놓인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나만의 생각을 더 하지 못한다면 ‘유명한 작가네’, ‘색이 이쁘네’처럼 표면적인 감상이 그치고 말기 때문이죠. 이왕 예술을 꾸준히 소비하길 마음 먹었으면 이것보다는 더 알차게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비주얼 리터러시는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동안 작품이나 전시를 봐왔던 경험과 방법을 되새겨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틀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더라고요. 물론 모든 예술 작품에 제가 생각한 이 틀이 들어맞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꾸준히 전시를 보고 있는 입장에서, 그리고 예술 이론을 전공한 제 관점에서 지금부터 저의 얕은 틀을 소개해 볼까 해요!
먼저 앞서 살펴본 비주얼 리터러시의 정의를 한 번 더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시각적 이미지를 1) 이해하고 여기에 2)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 이걸 좀 더 쪼개볼까요? ‘작가의 경험', '사회적 맥락', 그리고 '나의 해석'이 세 가지로요. 저는 그 동안 이 세 가지 꼭지를 가지고 작품과 전시를 감상해 왔더라고요. 그리고 이 세 가지가 공통으로 모이는 지점이 '내가 본 작품과 전시에 대한 나의 비주얼 리터러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세 지점을 좀 더 들여다볼게요.
작품에는 작가 개인의 경험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때로는 어릴 적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는 작가도 있고, 특정 철학적 주제나 사물을 작품에 반복적으로 담기도 하죠. 심지어 구체적인 대상이 연상되는 구상 작품을 주로 그리는지 혹은 무얼 그렸는지 모호한 추상 작품을 주로 소재로 삼는지도 하나의 작가 경험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모든 것이 모여 작가만의 ‘예술 세계관’을 형성하기 때문이에요. 작가의 경험은 관람자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작가의 정해진 의도이기 때문에 비주얼 리터러시에서 ‘이해’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회적 맥락은 거시적인 맥락과 미시적인 맥락이 있어요. 작품에 얽힌 시대나 역사, 혹은 인상주의와 같은 예술 사조는 사회의 큰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거시적인 맥락이에요. 반면에 미시적인 맥락에는 작품이 어느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고, 어떤 주제 의식을 가진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는지 등을 의미해요. 역사적으로 큰 흐름을 관통하기보다는 지금 현재 놓인 공간과 상황에 가깝죠. 작가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맥락 또한 작가의 경험처럼 ‘이해’의 영역이에요. 관람자의 해석이 개입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나의 해석은 말 그대로 작품/전시에 대한 관람자인 ‘나’의 주관적인 해석을 의미해요. 작품이 예쁘다, 크다, 징그럽다 등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부터 앞서 말한 작가의 경험,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감상까지 모두 포함해요.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영역인 셈이죠.
비주얼 리터러시는 ‘이해’에 해당하는 작가의 경험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의미 부여’에 해당하는 나의 해석이 모두 모이는 지점에서 결정되는 것 같아요. 벤다이러그램으로 치면 세 영역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영역이에요. 작가와 작품을 개인적/사회적 맥락에서 더 잘 이해하고, 여기에 나만의 생각을 붙이는 연습을 더 많이 할수록 해당 작품/전시에 대한 나의 비주얼 리터러시는 커지는 것이죠.
비주얼 리터리시를 갖추는 것은 작가, 사회, 나의 영역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내가 본 작품/전시에 대한 더 많은 벤다이어그램을 그려 볼수록, 예술을 보는 안목도 키울 수 있죠. 제가 그동안 이 세 가지 지점을 채우기 위해 활용했던 방법을 짧게 소개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전시장에서 제공하는 전시 서문과 팸플릿을 꼼꼼히 읽어보는 것이에요. 사전 공부 없이도 가능한 방법이기도 하죠. 보통 전시 팸플릿에는 전시와 작가 소개가 함께 담겨있어요. 작가가 어떤 배경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고, 이번 전시가 가진 사회적 의의나 맥락도 함께 파악할 수 있죠.
이외에 특히 작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가고 싶다면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요새는 자기 홍보를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많아요. 물론 전시를 소개하는 인플루언서 계정도 많고요! 또, 유튜브에 작가 이름을 검색하면 미술관에서 진행한 여러 인터뷰 콘텐츠도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저는 전시를 보러 가는 길에 유튜브에 ‘OOO 작가’, 'OOO 작가 인터뷰' 검색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인터뷰를 보고 가면 내적 친밀감도 생기고, 작가의 세계관을 미리 알 수 있어 훨씬 몰입해서 전시를 감상할 수 있어요.
만약 전시나 작품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미디어 뉴스도 정말 많은 도움이 돼요. 인터넷 검색창에 전시 이름,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을 검색하다 보면 의외로 전시 공간에 대한 이야기와 전시가 열리게 된 배경을 다룬 뉴스가 눈에 띕니다. 최근에 한남동 타데우스 로팍 해외 기반 갤러리에서 열린 <지금 우리의 신화>라는 전시를 본 적이 있어요. 방문 전에 뉴스를 검색하다 보니 이번 전시가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리는 첫 한국인 단체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러면서 뭔가 전시에 대한 기대감이 더 생겨서 설레는 마음으로 전시를 봤던 기억이 있어요.
나만의 해석과 생각을 더하기가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작가와 사회적 맥락을 알아가는 건 ‘공부’의 영역이기 때문에 노력을 살짝 기울인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지만 해석을 더 하는 건 뭔가 더 부담되는 게 사실이에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나, 내 해석이 너무 뻔하지 않나 고민이 들 때도 있어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요.
이럴 땐 전시나 작품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한두 가지 단어로 우선 표현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 작품은 왠지 모르게 상쾌한 기분이 들어’, ‘이 작품은 나한테는 조금 슬프게 느껴지네’처럼요. 그다음엔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에요. ‘이 작품은 작가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걸 표현한 건데 전시장 한켠에 사랑하는 연인의 몸무게에 비례하는 사탕을 산처럼 쌓아두고 관람객에게 하나씩 가져가게 했네. 근데 뭔가 작가가 사랑하는 연인을 의미하는 사탕을 관람객이 하나씩 집어 가니 슬프면서도, 작가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따뜻해’처럼요.
전시의 주제를 가지고 생각을 확장하는 방식도 있어요. 이건 제가 실제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만약에 전시 주제가 ‘세상에 모든 것이 조각 작품이 될 수 있다’라면 작가는 어떤 사물까지 조각이라고 보았는지,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조각 정의는 무엇이었는지 비교해보는 것이에요.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조각은 야외 동상이나 대리석이나 석고로 만든 인물상인데 작가는 그것이 단단하든 부드럽든 ‘부피가 있는 모든 것’은 뭐든 조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요. 그리고 작가의 주장에 내가 동의할 수 있는지도 함께 고민해보면 그게 나만의 해석이 되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학업에 몰두할 때 '내가 지금 성장하고 있는 게 맞나', '난 뭘 배우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바로 어제가 아닌 6개월 뒤를 되돌아봤을 때 성장했다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비주얼 리터러시도 비슷한 것 같아요. 당장 오늘 작품/전시를 봤다고 해서 다음 날 바로 예술에 눈이 뜨이는 건 아니지만 차곡차곡 여러 작가를 알아가고 더 많은 전시를 볼수록, 그리고 작게라도 나만의 생각 근육을 키울수록 어느새 예술을 더 잘 이해하는 나를 어느 순간 발견하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 나만의 안목이 생기고 취향이 견고해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도 저와 함께 차곡차곡 비주얼 리터러시를 길러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