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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6. 2024

영원의 숲 #13

"최상위의 포션"




  HP와 MP, 심지어는 LP까지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는 최상위의 포션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선량한 이의 눈물로.


  선량한 이가 인간을 위해 흘린 그 눈물이 명약이 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치유한다.


  그 눈물은 인간의 공통적 운명에 내려앉는 눈물이기에.


  인간은 어떠한 운명 속에 있는가?


  순수하게 자신을 슬퍼할 수 없는 공통의 운명 속에 있다.


  우선은 자신을 슬퍼하는 일에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간주된다. 잘한 것도 없으면서 왜 징징 짜냐고 성가신 존재로 취급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있다. 이로 인해 악에 받쳐 압력솥의 증기처럼 새어나오는 원한의 눈물만이 준비된다.


  다음으로, 울면 진다고 생각된다. 강자의 증거는 안면의 근육을 굳히고 도리어 상대가 힘든 표정을 보일 때까지 버텨내는 일이라는 착각이 팽배하다. 자신이 울지 않기 위해 다른 이를 대신 울리는 일은 언제나 이 착각의 귀결이다.


  또는 자신의 눈물을 도구로 이용한다. 자신이 얼마나 아픈 고통을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멋진 모습으로 서있는지에 대한 스웩의 소재다. 이 경우 눈물은 자신의 특별함을 보상하고 증명해줄 생체적 액세서리다.


  이러한 눈물들은 순수하지 않다.


  자신을 순수하게 슬퍼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다.


  모든 비극은 주체 자신이 처음부터 울지 못해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그 끝에 가서야 모두를 눈물짓게 의도하는 비극의 구조는 이 사실을 방증한다.


  바로 이러한 비극적 이야기의 구조가 인간의 공통적 운명을 만들어낸다. 비극은 우리 자신을 처음부터는 울지 못하게 작동한다. 그러면 비극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권위의 이득을 얻으려는 이들에게는 달갑지 못한 일이다. 비극의 구조는 더 많은 이들에게 지속되어야 하며, 그들의 운명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 때문에 울 수 없는, 또는 이야기가 시키는 바에 따라서만 슬픔의 행위를 연기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 운명을 따르지 않으면 흡사 연극에서 혼자만 이상한 대사를 하는 찐따가 될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인간은 운명화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자유로 그러기를 선택했다고 믿는 착각까지도 생겨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자유로웠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울었을 것이다.


  누가 강요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두 가지, 바로 웃음과 눈물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만 진심으로 웃을 수 있고, 진심으로 울 수 있다.


  순수한 웃음과 눈물이란 것은 자유 그 자체의 표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유가 공통의 운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한다.


  이야기로부터 벗어나 인간은 그 자신이 될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아니 누구나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자유야말로 실은 인간의 참운명이라는 사실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통찰은 정확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어졌다. 비록 사르트르가 자유라는 것을 썩 유쾌한 것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그의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반영하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 결국엔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벗어나 구조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유도 그 맥을 함께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사르트르와 결별한 지점에서도, 그러나 그의 통찰은 빛나고 있다.


  "인간이여, 그대 자신이 되지 않겠는가?"


  실존주의적 지향은 소크라테스로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가 실존철학자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삶]은 그 자신이 될 자유를 내포한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싶은 것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이 되어 사는 대신에, 그 자신으로서 죽었다.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창조했다.


  운명을 창조하다니! 이것이 자유의 의미던가?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의 벅차오른 가슴이 알려준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만을 모를 뿐이다.


  붓다는 차근차근 그 방법론을 아주 잘 알려주었다.


  붓다가 처음 생로병사의 현실을 본 날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니, 모두가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니,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이란 말인가.


  슬프다. 인간은 왜 괴롭게 살다가 죽어야만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붓다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가 아니다. 나는 이런 내러티브를 길게 늘어놓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없다. 그러니 결론으로 바로 가보자.


  왜 슬펐을까?


  너무나 예쁘고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이 사실이.


  붓다는 발견한 것이다.


  존귀함을.


  인간의 삶이 잃어지는 일이 그렇게 충격적이고 속상했다면,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하고 절대적으로 귀한 것은 바로 그 인간의 삶이었다.


  내가 바로 그 인간이다.


  내가 인간이었구나.


  상실의 충격만큼 재회의 충격은 동일하게 어마어마한 크기로 붓다에게 밀려왔다.


  선량한 이가 인간을 만났다.


  이제야 만나게 된 그 귀한 것을 위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인간이 가장 귀한 것으로서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다는 그 인간의 공통적인 운명 위로, 참운명 위로.


  그것은 순수하게 자신을 슬퍼하는 눈물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을 인간으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아본 그 슬픔이었다.


  그러나 슬픔이라고만 쓰지 말고, 이제는 기쁨이라고도 써보자. 이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뜻이 아니다. 애초에 그 둘이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를 말하고 싶다.


  웃음과 눈물은 같다. 그것은 자유의 근원적 표현이다.


  자유는 비극적 이야기의 속박 속에서도, 인간이 가장 존귀한 것이라는 참운명을 창조하는 일, 곧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웃음과 눈물이 그 일을 한다.


  또 다시 써보자.


  자유는 비극적 이야기의 속박 속에서도, 자신이 가장 존귀한 것이라는 참운명을 창조하는 일, 곧 자신이 되어가는 일이다. 웃음과 눈물이 그 일을 한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생환한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많이 웃고 많이 울었던 이들이 살아남았다고, 어떤 구조적 폭력 및 억압도 웃음과 눈물의 자유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고, 그 비극 속에서도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 위에 서려고 했던 이들이 결국에는 자유롭게 되었다고.


  자유는 자신이 되어가는 것. 자신으로 드러나는 것.


  눈물로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자유의 길이, 자신을 향한 길이 그 길이다.


  인간인 자신을 위해 흘린 더 많은 눈물에 마침내는 비치게 된다.


  자신의 얼굴이.


  울고, 웃고, 티없이 소중한 그 얼굴이, 투명한 눈물방울에 거울처럼 비친다.


  누구도 자신을 울릴 수 없다. 자신은 자신이 울고 싶을 때만 운다. 눈물은 순수한 자유의 표현이다.


  우리가 만약 자유로웠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울고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우리가 울고 있었다면 우리는 일찌감치 자유로웠던 것이다. 오롯이 자신의 자유에만, 그 참운명에만 근거해서 자유로웠던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완전한 회복은 이루어졌다.


  최상위의 포션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된다.


  실은 창조된 것은 포션이 아니라, 이제 자유로운 참운명을 살아가는 인간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포션만이 영원의 숲에 남겨진 그 뜻은 인간을 위한 끝없는 선의.


  또 다른 선량한 여행자가 문득 그 순수한 눈물이 담긴 병을 발견했을 때, 아아, 반드시 비치리라.


  그 살아있는 얼굴이.


  그리고, 그 귀한 것을 위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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