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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7. 2024

영원의 숲 #14

"경계의 기쁨"




  드래곤 퀘스트, 파이널 판타지, 위저드리, 울티마, 이곳은 이 작품들의 초기작에서 느껴지던 그 어떤 감성을 담아내고 싶었다. 그것은 이미 클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느 것.


  도트로 표현되던 그 게임 속 세계들은 지금의 정교하고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게임들보다 오히려 더 살아있는 생동감을 갖고 있었다. 구성이 탁월해서도 아니고, 스토리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도 아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그 경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모니터 속 세계와 모니터 밖 세계의 경계가 분명했기에, 그 게임세계들은 역설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경계가 있었던 까닭에, 거기에는 만남이 있었다. 그 만남이 빛을 가져다준 것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파이널 판타지 5의 저 유명한 엔딩의 장면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플레이어가 지금껏 여행했던 대지를 멀리서 비추어주며 아주 긴 스탭롤이 올라가는 모니터의 화면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던 이들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자신이 여행해왔던 그 세계가.


  게임 속 세계의 아름다움을 만들어준 그 무수한 관계자들에게 긴 시간 감사인사를 전하던 스탭롤은 이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남긴다.


  "And you."


  이 세계를 소중하게 여행해주어서 고맙다고, 당신이 여행해준 덕분에 이 세계가 이토록 아름다워졌다며, 게임 속 세계는 직접적으로 그렇게 플레이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이 감각을 정확하게 안다.


  파이널 판타지 5가 주요하게 참고한 작품인 미카엘 엔데의 네버엔딩 스토리에서도 이 감각을 자극한다.


  한 소년이 환상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용사의 모험담을 읽는다. 책의 마지막에서 그 모험이 전부 다 실패로 돌아가 좌절하고 있는 용사의 모습을 보며 소년이 함께 속상해할 때, 용사의 옆에 있던 환상세계의 여왕이 용사를 위로한다. 용사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용사가 정직한 마음과 용기로 모험을 끝까지 완수함으로써 구원자를 부르는 일에 성공하고야 말았다고.


  그리고 여왕은 말을 건넨다.


  책 밖으로.


  소년의 이름을 부른다.


  당신이 용사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울고 웃으며 여행한, 당신이 사랑한 이 세계를 구해달라고.


  이것은 매체 안과 매체 밖의 만남이었다.


  경계가 있기에, 그 경계로 인하여, 오히려 만남은 가능했다. 더욱 살아있었다.


  진짜 같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그 허구의 경계가 아주 분명해서 그것은 진짜를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의 게임은 더욱 진짜같음을 표방한다. 모니터의 벽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더 적극적으로 게임세계 안으로 들어와 그 모든 것을 실제처럼 경험해주기를 권유한다. 게임세계는 무대이고, 플레이어는 무대 위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설정된 것이다. 심지어 그 주인공에게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라고 자유도를 높인다.


  그렇게 플레이어가 전격적인 주인공이 되어 한층 진짜같은 게임세계를 더욱 자유롭게 즐기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감증은 크다.


  경계가 무너져서 생긴 일일 것이다.


  대부분의 이상심리학적 증세는 경계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아주 쉽게, 경계가 분명해야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남의 경계를 침범하는 이들은 자기의 경계가 완고하게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경계가 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한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다고 쉬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지금 경계가 없어서다.


  행복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행복의 기준, 바로 그 경계는 스스로가 설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계가 없으면 아무리 기쁘고 좋은 어떤 경험들을 하더라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체감하지 못한다. SNS에 전시되는 무수한 남들의 기준만을 쫓아 이렇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많은 경험을 따라해보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으며 종국에는 지치고 공허해질 뿐이다.


  영원도 마찬가지다.


  영원은 경계가 분명해야만 드러나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이라는 아주 확실한 경계가 있었기에, 인간은 영원을 꿈꾸게 되었다. 시작부터 그러했다.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은 경계의 확인이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인간은 유한하다. 그렇게 경계가 분명해진 인간에게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지금 이 자리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만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이라는 바로 그 현존의 사실이 돌연히 우리를 휘감아돌며 전율시킬 때, 영원은 지금 막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처럼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경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있는 척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것으로서 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것으로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주 특유한 향기가 있다.


  그것은 고급스러움의 향기다.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니며, 화려한 옷을 입어서도 아니고, 얼굴이 잘 생겨서도 아니다.


  돈이 많고, 똑똑한 말을 일삼으며, 비싼 수트를 입고, 피부과에서 관리받고 있는 용모로 다니는 이들이, 왠지 모르게 빈곤하고 허섭해보이는 경우는 허다하다. 부티는 나는데 귀티가 없다는 말로도 표현가능할지 모르겠다.


  마음이 가난하고, 그 존재가 쭉정이라서일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정신론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생리적인 차원의 얘기다.


  생명은 최상치의 고급현상이다. 생명의 본성껏 살아있는 것으로 살고 있는 일이 고급지게 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생명은 경계를 지음으로써 생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경계가 없으면 생명도 없다. 생명은 허물어진다.


  경계가 없이 자기가 모든 경계에 통달한 주인공인 척하는 일은 생명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명의 활동인 마음이 나날이 가난해지고,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가 공허한 쭉정이로 화해가게 된다.


  클래식은 왜 고급스러움과 일정 부분 동의어가 되는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경계가 분명해서다. 고급스러운 모든 것은 그 경계가 분명하다.


  이를테면, 정신분석만을 45년 해온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 말만 들어도 그에게서는 뭔지 모를 고급진 향기가 풍긴다. 꼭 정신분석이라서가 아니다. 누군가는 45년 경력의 인지치료자다. 그 역시 동일한 고급스러움 속에 있다. 이 고급진 모습은 해당분야에서 단지 오래 활동했다는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군대 병장도 고급스러워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급스러움은 다만 경계에 대한 분명한 존중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반대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그림을 떠올려보자.


  "정신분석과 인본주의 상담을 선별적으로 통합한 구조에 분석심리학의 전제와 실존치료적 태도를 갖추구요. 가끔 테크닉으로 인지치료와 게슈탈트의 기법을 활용합니다. 최면과 명상적인 메타인지의 기제 그리고 내러티브 테라피의 관점도 치료적 이득을 위해 도입하고 있구요. 결과물에 있어서는 현실치료와 대상관계이론의 장점만을 살려 최고의 치유효과를 조력합니다. 조금 더 빠른 효과를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DBT도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를 무시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비루하고 저질스럽다.


  요즘 힙스터 내지 힙스터 워너비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무슨 얘기만 나오면 자기가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인 척 구는 일에 여념이 없다. 오직 그 일만을 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철학 애기가 나오면 자기 철학 잘 안다고 하고, 축구 애기가 나오면 자기 축구 잘 안다고 한다. 자기는 모든 분야에서 그 핵심만을 통달한 대천재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가브리엘 마르셀과 메를로퐁티, 그리고 미셸 앙리는 저마다 신체성에 대해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데 그 핵심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조용히 침묵하며,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가 그저께 먹은 오마카세 얘기로 화제를 돌리려 한다. 실은 침묵보다 더 빈번한 양식은, 그런 질문을 한 이를 무슨 인생에 도움안되는 헛지식만 추구하는 오타쿠라도 된 것처럼 쳐다보는 일이다.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은 전문적인 일이고, 남들이 자기보다 더 아는 것은 인생낭비의 미친 짓이다.


  결국 경계를 무시하고는 자기가 어디서나 제일의 주인공으로 잘나야 한다는 고집과 행패에 다름아니다.


  왜 그러고 있는지도 분명하다. 불감증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지금 불감하기에, 남들의 찬사나 인정을 얻어냄으로써 자기가 그래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자기최면해보려는 것이다.


  이처럼 경계를 무시하는 일은 곧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특별한 주인공적 자기라는 것을 과도하게 추구하기에 결국 자기기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방식은, 자기만의 길을 간다는 식의 행동양식이다. 세상의 많은 소재를 경험하다보면 남들은 모르는데 자기만 아는 맞춤형의 어떤 특별한 소재를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 이 행동양식은 전개된다.


  이를테면, 자기는 특별하게 위스키를 즐길 줄 아는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이가 있다. 그는 유치하게 블렌디드 위스키를 마시냐며, 자신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있는 증류소들마다의 고유한 풍미를 내는 몰트 위스키만을 마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요즘엔 그런 이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다 유튜브와 SNS에서 전시되는 표본을 따라 똑같은 몰트를 소비하며 똑같은 감상을 말한다. 자기만 특별한 줄 알았는데 5만 명이 똑같이 하고 있다.


  이런 이는 그래서 이제 정말 어디 구석에 있는 마이너한 증류소를 찾아 그 원액을 손에 넣으려고 아둥바둥한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몰트를 손에 넣는 일에 성공하면, 마시기도 전부터 이미 답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그 몰트가 자신이 찾고 있던, 자신에게 딱 맞춤형인 그 몰트인 것이라는 답을.


  한 모금을 시음해봤을 때, 맛이 역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 답은 내려져있다. 그는 정보에 자신의 입맛을 맞춘다. 자신의 생리적 반응을 무시하고는,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자신이 누구인지를 궁극적으로 설명해줄, 바로 자신만의 'The 몰트위스키'의 맛을 뇌속에서 재조합해서 경험할 것이다. 그렇게 가상현실이 또 다시 승리했다.


  정보로 몸을 속이는 일.


  언어로 삶을 속이는 일.


  바로 이런 것이 경계를 무시하는 대표적인 일이다.


  요란하고, 난삽하며, 핵심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지루하다.


  언어로 추구하는 자기만의 길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반면 아주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근거한다. 경계는 언어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기쁨이 자연스럽게 경계가 된다. 그게 곧 자신에게 적용될 행복의 기준이기도 할 것이다.


  클래식의 게임들은 그러했다.


  게임이 게임다워서, 우리의 몸도 몸다울 수 있었다. 그래서 둘 사이의 만남이 가능했다.


  그것은 경계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냥 허구의 게임일 뿐이지만, 그 게임 속 세계를 게임의 주인공과 함께 여행하는 일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래, 어쩌면 그것은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과도 유사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주인공이지 않을수록, 그러한 경계의 기쁨은 커져만 갔다. 


  더욱 소중하게 그 모든 순간이 영원의 빛으로 아로새겨졌다.


  바츠, 레나, 파리스, 간달프, 쿠루루.


  아주 오랜 옛친구의 이름을 부르듯이 정겨운 것은 그들이 그 세계에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불렸을 때, 나는 나에게로 돌아와 알게 되었다.


  그것을 사랑했던 시간의 내 삶을 나는 깊이 사랑했음이라.


  저마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주인공을 부르는 공간이 아니다. 경계에서 내가 불려질 곳이며, 그렇게 나로 돌아올 곳이다.


  결국에는 모든 만남이 내 삶을 향한 사랑이었음을 떠올릴 곳.


  그것은 경계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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