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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9. 2024

영원의 숲 #16

"마음의 자유"




  어떻든 나는 결국 하늘을 나는 일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하늘에 도달하는 법은 바로 거기에 그냥 있는 것이라고 『갈매기의 꿈』에서 치앙은 조나단에게 가르친다.


  더 분주한 것이 아니다. 도달하고 싶은 그 자리에 이미 고요하게 있는 것이다.


  치앙은 그렇게 조나단에게 '마음의 자유'에 관해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자유로울 때 우리는 반드시 영원에 도달한다. 최고의 하늘에 도달한다.


  아니, 바로 그 하늘에서 산다. 하늘이 우리의 터전이 되어.


  우리가 영원을 산다는 말을, 통속적으로 우리의 모습이 끝없이 연장되어 지속되는 어떤 불로불사와 같은 모습으로 이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은 영원이 아니라 다만 죽지 않은 언데드, 흡사 좀비의 모습일 뿐이다.


  보다 실제적이고 단순하게, 마음이 자유로운 그 순간 우리는 영원을 사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절대적으로 영원을 소망한다, 이렇게 말하면 갸우뚱할 수 있다. 자신은 종교인도 아니고, 지금 사는 걸로 만족하는데 그런 수상한 것과 자신을 엮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일한 의미를 다르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다 마음의 자유를 소망한다.


  이것은 훨씬 더 고려해보기에 좋은 말일 수 있다. 섬세한 이들은 이 말을 실증적으로 적용해 탐구해보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가 하던 모든 일이 다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한 일들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돈은 왜 버는가?


  돈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우리가 하던 모든 일에도 한번 이를 비추어 생각해보자. 그 일들은 다 어떠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 그렇게 하고 있던 일들이다.


  마음은 자유로울 때 편해진다.


  편하다, 행복하다, 살기 좋다, 이런 표현들은 분명 마음의 자유에 근거해서 세워지게 된 현실의 느낌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는 '아, 이런 순간이 계속되었으면.'이라고 명백하게 바라고도 있다.


  영원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거나 그 표현에 관심이 없는 이라 할지라도, 실은 이처럼 우리는 이미 영원을 향한 실제적인 소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바라고 있지만, 모두가 얻고 있지는 못한 것, 이것은 영원의 딜레마일 것이다.


  영원이 희소재라서 특별한 상위의 계급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영원이 어떤 거래의 소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거래는 조건으로 구성되며, 무조건이 등장할 경우 거래 자체는 해체된다. 마르틴 부버는 이것을 '나-그것' 관계와 '나-너' 관계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했으며, 에리히 프롬은 유사하게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말한다.


  우리가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고 할 때를 떠올려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상황을 조건화시키고 있는지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돈이 있어야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매우 자주 간주하곤 한다. 그러니 돈이 없는 동안은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고, 아니 반드시 없어야만 한다고 설정된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조건화의 한계 속에 자신을 결박시킨 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해당의 조건뿐이다.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헤라클레스의 위업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러한 영웅주의 또한 하나의 조건화다. 여기에는 힘이 있어야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조건이 걸려있다. 힘이라는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사람들로부터 얻는 인기라는 조건이 출현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부자유하게 만드는 한계들만을 거듭해서 만들어간다. 마음의 자유는 아득하게 요원해진다.


  그렇다면 혹시나 운이 좋아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난 이는 시작부터 조건을 달성해 마음의 자유를 얻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조건의 달성이 문제가 아니라, 조건화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돈에 의해 어떠한 좋은 상태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이제 돈이 없는 이보다도 더욱 돈에 집착하게 된다.


  조건화의 치명적인 특성은, 조건을 달성하고 있는 이에게 더욱 강력하게 조건화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건을 달성해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조건에 한층 더 매이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이 엄청난 무력을 얻으면 그 누구에게도 쫄지 않고 가장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나아가 그가 드래곤볼을 모아서 지구에서 가장 힘센 존재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의 마음은 자유로울까?


  그 반대로, 그는 무력의 조건을 달성하기 전보다 더 큰 두려움에 시달릴 것이다. 이제는 지구의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지겨내야 하는 까닭이다. 한 번이라도 쫄아있는 모습을 보이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다. 바로 그런 마음의 두려움 속에서 그는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선(禪)은 마음의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아주 특화된 삶의 방식이다.


  선은 무엇을 하는가?


  거래를 하지 않는다. 조건화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바로 간다.


  자유가 필요하다면 바로 자유의 자리로 갈 뿐, 자유를 얻기 위한 조건적 과정을 알고리즘처럼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갈 수 있는 것은 무리수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척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원래 자신의 것을 거래하는 이도 있는가?


  자기 집의 화장실을 갈 때,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고 난 다음 그 보상으로 자신에게 화장실 문을 여는 일을 허용하는 이도 있는가?


  선은 원래 돌아가지 않고 가장 빨리 가는 길이다. 가장 빨리 깨닫고 싶은 이들이 선으로 간다. 화장실이 급한 이라면 바로 화장실로 가야 한다. 선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이 단순한 정직성이다.


  무엇을 속이지 않는가?


  그것이 원래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래도 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은 원래 처음부터 자유로운 것이었다.


  영원은 원래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었다.


  너무너무 좋은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조건은 만들어진다. 조건의 성취를 통해 그 좋은 것을 가져도 되는 자격을 점차 자신에게 부여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지구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고 오해할 때 생겨나는 모습이다.


  실은 주인인데.


  선의 대화가 웃기고 재미있는 이유는, 주인이 자기가 주인인 줄을 까먹고 이런저런 눈칫밥을 스스로에게 먹이고 있는 광경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은 이러한 삶의 근원적 소재를 다루는 아주 고급의 코미디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


  나는 이미 주인이었다.


  이러한 자각이 분명해질 때, 또는 그것이 정말로 사실임을 상기하게 될 때, 인간은 깨어난다. 지금까지의 현실과 완전히 다른 현실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조건을 걸지 않는 무조건의 현실을 자신의 시야에 두려고만 한다면, 이 또한 유효하다. 마음의 자유는 시작된다.


  물론 함정도 있다. 우리가 잘 빠지곤 하는 함정에 대해서는 묘사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돈이 있어야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된다."라는 조건화의 명제로 살다가, "내가 주인이다." 등의 말을 듣고 그 말에 감화된 이들은 종종 잔머리를 굴려 역조건을 구성하려고도 한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돈이 있게 된다."의 방식이다.


  그렇게 시크릿 류의, 오늘날 유튜브 등지에서 무수한 자기계발장사꾼들이 떠드는 얘기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내가 먼저 주인이 된 것처럼 하고 있으면, 그 주인에게 걸맞는 부와 명예, 권위 등을 얻게 된다는 식이다.


  여기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역조건도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자유가 아니라, 1번방에 갇혀 있던 노예에서 3번방에 갇혀 있는 노예가 되는 또 다른 조건화일 뿐이다. 프라이팬에서 돈까스로 튀겨지는 것보다는 수육으로 천천히 삶아지는 게 낫지 않겠니, 라는 '다정하고 인간적이며 양심적인' 장사꾼들이 자주 이러한 역조건의 길을 안내한다. 오늘은 그들이 수육이 먹고 싶어서다.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주인이라는 것이다.


  어디서나 주인인 이는 "이제 내가 당당한 주인이다!"라며,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난입해서 진짜 주인이 왔으니 얼른 짐들 빼고 나가라는 정신병적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 주인인 척하는 사기꾼이나 그런 일을 한다.


  진짜 주인이라면 자신의 지구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의 웃음을 꿈꾼다. 이것을 환대라고 부를 것이다.


  주인은 원래 환대하는 자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릴 때 달려나가 기쁘게 환대한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늘 눈치를 보며 위축되어 사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임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주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늘 거렁뱅이 차림으로 문을 두드리며 다녔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조나단의 스승 치앙은 결국 어떤 얘기를 하는가.


  "조나단, 끝없이 사랑하거라."


  가장 멋진 비행법, 바로 사랑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라고 치앙은 조나단에게 안내한다. 영원의 자리에서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난다고.


  그게 마음의 자유가 끝없이 뻗어나가는 방식이다. 사랑은 자유의 증진이다.


  그리고 실은 우리 모두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우리는 베푸는 일을 좋아한다. 무엇이라도 조건을 걸지 않고 대가없이 그냥 베풀고 온 날이면, 우리의 가슴에서는 어떠한 기쁨이 아주 크게 부풀어올라 하늘을 날 것만 같다. 정말로 마음은 저 높은 조나단의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임을 체감하며 확신한다.


  물론 그러한 상태의 성취가 자신이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재화의 양에 달려있다고 또 조건화의 착각을 이루면 우리는 그 순간 수직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면 삶은 언제나 모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고되다.


  그 좋은 상태의 성취는 단지 무조건성에만 달려 있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도 된다.


  우리의 주인됨은 우리의 본성에 달린 것이라고.


  그러니 해야 할 일은 실은 남에게 뭘 주는 요식적인 행위와 같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자신의 마음이 지금 바로 편한 자리로 가면 된다. 그러면 그 일이 타인을 향해서도 자연스럽게 베품을 이룬다. 솟아 나오는 샘물이 주변에도 그 물의 이득을 자연스레 전하게 되는 이치와 같다.


  사랑은 결국 사랑이라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상태다.


  가장 자신다운 상태다.


  어디서나 주인인 상태, 곧 어디서나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상태.


  마음의 자유가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라는 가상의 권리 같은 것을 무리수를 두며 가열차게 행사하려고 한다. 가짜 주인의 상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혐오는 이 가짜 주인들이 서로 싸우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소외는 이 가짜 주인들이 잠깐 싸움을 멈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진짜 주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든 가짜 주인으로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이 오늘날의 현실을 선사들은 어떻게 볼까?


  조나단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수평비행부터 시작하자."


  어떻든 나는 결국 하늘을 나는 일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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