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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Jun 17. 2024

심리학 오마카세 #1

"운의 심리학"




  일단 우리 모두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운이다.


  운이 없으면 어떤 좋은 것을 얻게 된다 해도 다 의미없는 까닭이다.


  예로부터 여행을 떠나는 이를 축복하는 이유는 운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일단 그것은 무슨 우주의 기운 같은 외적 요소가 아니다. 운은 내적인 조건들에 기인한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운명은 성격 속에 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운이 내적 작용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운에 관한 영미권의 심리학적 연구들에서 밝히기로는, 운의 심리학적 이름에 가장 가까운 것은 <회복탄력성>이다.


  이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르게 안심의 자리를 찾으며, 나아가 역경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특성을 뜻한다.


  그리고 이 회복탄력성은 얼마든지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개화시킬 수 있는 특성이다.


  운명은 성격 속에 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갖고 와 보자.


  성격(personality)이라는 것은 특정한 자극에 대해 특정한 양식으로 반응해온 경험들이 일관적으로 지속되어 형성된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한번 형성된 성격은 자체적인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성질을 갖는다.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라며 기존에 형성된 반응양식을 견지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반응양식이 우리 자신을 위해 조금도 유용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바로 그렇게 반응하곤 한다.


  그리고 이미 예상된 결과 앞에서 거의 반드시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진짜 운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열심히 하면 뭘 하냐, 운이 없는데."


  그는 열심히 하긴 했다.


  성격에 기인해 생긴 자기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용사처럼 분투했다.


  이세계로 전생하는 수많은 용사들처럼 여신의 가호 하나 받지 못한 채, 맨몸에 목검 하나로 황무지에 내던져진 그는 필사적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가운데 자신만은 반드시 자신을 지켜내겠다고.


  그는 처음부터 운을 갖지 못한 저주받은 운명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살고 있어서 운이 없어진 것이다.


  단지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하나의 반응양식에 불과한 성격을 고정적인 실체처럼 여기며, 거기에 입각해서 자기라는 것을 세우고 있었기에 그는 아주 많은 상황들에서 적절하게 조화로운 반응양식을 이루지 못해 힘들었던 것이다.


  운명이 성격 속에 있는 것이라면, 운명은 지금 성격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질이 더러워진 것이다. 저주받은 운명의 상태란 이런 것이다.


  성격 밖으로 나가면 운명은 그 표독한 저주에서 풀려난다.


  가장 운 좋은 것이 된다.


  바로 자유가 된다.


  운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 방향성이다.


  자유는 또한 함께 자유함을 끌어와, 더 많은 자유를 창출해낸다.


  운이 좋아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주변인들을 가까이에 끌어들이는지를 기억해보자. 그 옆에 있기만 해도 자신에게 행복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어떠한 직감 속에서 사람들은 운이 좋은 이의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작용하는 그 '운빨'의 세례를 받고자 그의 곁으로 향한다.


  그렇게 성격 밖으로 나가게 된 운은 새장에서 풀려난 새와 같다.


  아주 거대한 새.


  그 등에 타고 날아오를 때, 우리는 운을 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좋은 운을 맞이하기 위한 좋은 성격을 갖는 일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성격 자체로부터 외부로 나가는 일이다. 나쁜 성격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나, 좋은 성격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나, 그 둘은 똑같다. 똑같이 최상의 것이다.


  이것은 심리상담에서 심리적 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상정되는 두 특성을 묘사한다.


  하나는 개방성이고, 다른 하나는 유연성이다.


  회복탄력성은 바로 이 두 요소로 구성된다.


  이것은 특정한 성격이 드러내는 특성이 아니라, 특정한 성격에 머물지 않는 이가 보이는 특성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에게 쌓인 시계의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임의적인 방향성으로 반응해온 과거의 패턴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작용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생명이라고 말해보자, 늘 더 큰 자유를 향해 이동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생명의 이러한 본성은 운의 핵심이다.


  가장 자신이 되는 일이란 알고리즘과 같은 반응양식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자신의 생명된 본성을 따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이에게는 운이 있다.


  생명이야말로 최상치로 운이 좋은 존재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 생명이 출현하기 위해서 대체 얼마만큼의 기적이 필요했을지를 우리는 추산할 수 없다. 좋아도 너무 좋은 운이다. 나아가 그 생명이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거나, 또는 글을 읽고 있는 이 인간이라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또 얼마만큼의 운이 필요했을까?


  가정환경이나 사회적 조건과 상관없이 인간은 시작부터 좋은 운을 타고난 인생이다.


  자신의 성격을 자기라고 생각하며 만리장성을 세우거나, 또는 더 유행하는 형태로는 자기 안에 여러 성격이 있다며 그 모든 성격이 다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유토피아를 세운다는 식으로 행위하고 있으면, 우리는 늘 운이 없다.


  그리고 운이 없는 만큼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힘겨운 노력이다.


  생명이 자신의 가열찬 노력으로 이 우주에서 지금껏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나는 말하고 있다.


  심리학적 건강이라는 것은 실은 아주 단순하다. 과거를 풀어헤치거나, 자기 안의 던젼으로 들어가 어떤 은밀한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방랑해야 하거나, 그렇게 알게 된 심리학적 정보를 또 자기 삶에 적용하기 위해 궁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심리학적 건강은 우리 자신의 본성과 일치해 살 때 자연스럽게 담보된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의도와 몸짓으로도 아주 성대히 펼쳐진다.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지 않은 일을 한번 해보는 일.


  절대 그 일을 하면 안된다고, 그런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유별나게 고집하는 바로 그런 일을 해보는 것은 조금 더 멀리 뛰어보는 일이다.


  프시케의 신화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상징한다.


  운은 절벽에서 뛰는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끝인 줄 알았지만, 완벽하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제퓌로스의 바람이 실어나르는 운빨을 타고 프시케는 그토록 보고팠던 연인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그녀는 아주 운이 좋은 인간, <호모 운좋으시우스>, 바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묘사다.


  이 프시케(Psyche)라는 이름의 어원으로부터 심리학은 출발했다.


  심리학은 타고 태어난 본성의 좋은 운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인간의 회복을 기원하고, 또 안내한다.


  우리의 만찬은 바로 이 자리에 착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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