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질의 심리학"
저렴한 감상주의에 위치한 대중심리학의 문제는 악의 문제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다는 식으로 모든 마음의 선함을 말하며 실제적인 악의 문제를 뭉갠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도 무수한 악의 현실을 경험하지 않는가? 그런 것들은 우리가 진정한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생기는 일인가? 또는 심리적 트레이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의 미숙함이 만드는 오해인가?
악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무시하는 것은 오히려 심리적 우회에 가깝다. 어떤 종교생활자들은 악의에 봉착했을 때 자신이 더 용서하고 품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악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 현실을 흐리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서운 까닭이다. 무서우면 없는 것처럼 또는 아닌 것처럼 우회한다. 그렇게 현실왜곡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심리를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분명 질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심리학 연구에서 질적연구의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가? 그것은 결국 심리라는 것이 질적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악은 질의 문제다. 그래서 악질이라고 말한다.
질적으로 악하게 드러나는 어떠한 심리적 양상이 있다.
보들레르는 악이 꾀하는 최고의 계략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악한 마음은 없다고 주장하는 진술들이 그러한 계략에 속한다. 물론 '악한 마음'이라는 어떤 실체를 우리가 논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한 심리소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악의 문제를 다루려면 그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악질의 현실이 출현하게 되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더 유익하다.
일상에서 "와, 악질이다."라고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를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갑질, 이간질, 수작질, 도둑질, 협잡질, 스승질, 대장질 등등의 온갖 '질'의 행위가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는 다 약자의 특징이다.
악질은 어디에서 출현하는가에 대해 실은 우리는 이미 분명한 답을 얻고 있다.
약한 자만이 악질이 된다.
이 또한 우회의 문제와 연결된다. 약한데 자신의 약함을 회피하려 하는 이들이 결국 악질의 길로 들어선다. 왜 그렇게 되는지도 명백하다.
약하다는 것은 힘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을 스스로 응답하지 않으려 할 때 그것이 약함이다. 이러한 이들은 그래서 다른 대상에게 자신이 응답해야 할 책임을 대신 돌리려고 한다. 그 목적을 위해 이간질을 하고, 협잡질을 하며, 갑질을 한다.
이것은 일종의 유아적 결벽주의의 상태다. 아이는 자신이 늘 도덕적으로 무결하고 깨끗한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프로이트라면 이를 항문기 고착의 성격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발달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들, 쉽게 말해 정신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이들은 늘 자신만이 순수하고 선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인 일들은 전부 다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못된 남들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책임은 타인들에게 떠넘겨진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유아적 결벽증과 도덕적 순결주의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그렇게 악질은 자신이 남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면서, 자신의 인식 속에서는 자기만 선하고 다른 이들이 악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지배적인 경향성을 갖는다. 정말로 유아의 '정의의 용사' 놀이 같은 것이다.
심리상담에서 누구도 노골적으로 얘기하진 않지만, 경험이 많은 상담자라면 자신이 어떤 것을 다루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들은 아주 빈번한 경우 실은 내담자 자신이 악질이면서 자신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 착각의 상황을 다룬다. 심리상담의 장면이 어렵고 힘들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실은 악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분명히도 심리상담을 찾는 내담자들은 자신의 이러한 성질을 직시해보고자 용기를 낸 아주 정직하고 고귀한 이들이다.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악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었다. 약한 자신을 극복하고, 실은 자신이 약하지 않으며 아주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내담자들은 회복하고 싶어한 것이다.
반대로 부정직한 회피의 행위만을 반복하는 악질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두려움이나 불안을 상대에게 떠넘겨 상대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일에 매진한다. 상대를 약하게 만들어야만 자기가 강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욕과 악질의 문제가 어떻게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기가 두렵거나 불안해서 약한 것 같을 때 상대를 대신 두렵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상대의 힘을 빼앗아 자신이 강한 척하고자 하는 일이 결국 악질 현상의 핵심이다. 정확히는 강한 척하는 일까지도 필요없을 것이다. 상대도 자기처럼 약해지면 충분한 목적은 달성된다. 상대들을 끌어내려 지옥에서 강제로 함께 머물게 하면 자기는 덜 무섭다고 느낄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것은 정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악질을 경험할 때 자주 느끼곤 하는 감상이다.
악질을 상대하면 할수록 우리의 질적 위상도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같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진흙탕에서 뒹굴어야만 하는 상황들이 반드시 발생하며 그에 따른 자괴감도 커진다. 우리 자신이 점점 더 하찮은 존재로 몰락해가는 심정이다.
니체도 얘기하지 않았던가. 괴물을 상대하는 자는 그 자신도 괴물을 닮아가게 된다고.
악질이 악질인 것은 인간의 위상을 더욱 낮은 질적 수준으로 계속 추락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총체를 자기와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자 어떻게든 발악을 한다. 하루라도 인류의 하향평준화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심지어 조바심마저 경험한다.
심리 또는 마음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이러한 악질에게 휘말리기에 딱 좋다. 마음에 대해 동시대적으로 유행하는 얘기들에 귀기울여본 이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러한 저주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이든지 공정하게 다 알아주어야 한다."
약자의 정신승리를 위한 행동원리에서 비롯한 이 저주의 문구는 은밀한 내적 명령어가 되어 이제 막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에게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가 무시하지 않고 다 상대해주어야 하는 소재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한다.
다 상대해야 하는 것이 책임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하지 않는 것이 책임이며, 회피하지 않는 길이다.
이솝우화에서도 묘사된다. 때릴수록 커지는 사과를 상대하지 않는 것이 나그네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건강한 방식이다.
불교적 우화에서는 저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든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독화살을 쏜 주체가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오직 지금 독이 퍼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안녕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어떤 마음이든지 정당하게 다 알아주어야 한다는 내적 명령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 힘들어지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에 대한 책임의 방기다. 그런 마음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 라며 우리가 상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을 더 건강한 질적 차원에서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악질들이 모든 것을 양적 문제로 치환한다는 것을 한번 이해해보자. 더 많은 것을 자기와 동일한 수준으로 환원시키려 하는 양적 의도는 우리의 가장 심대한 질적 차원에 폭력을 가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대체불가능성이다.
우리가 알아주어야 할 마음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알아주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저 기계장치다.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살아야 할 이유를 잃은 이는 약해진다. 니체도 프랭클도 그렇게 말한다. 자신을 약자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순간 기계부품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음'이라는 단어는 쉬이 우리 자신을 약자로 착각하게끔 유도하는 주문으로 작동하곤 한다. 약자가 마치 좋은 것인 양, 약자이기 때문에 친절해질 수 있다는 둥, 우리로 하여금 더 효율좋은 부품이 될 수 있도록, 이른바 호구가 될 수 있도록 악질의 마법을 건다.
이것은 더 많은 인간이 스스로를 약자라고 착각해야만 통제가 용이해지기에 만들어진 가상현실이며, 분명하게 한계에 부딪친 문명의 부작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지면을 확보할 것이다.
문명은 소위 스팸과 돼지 사이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추상물은 일견 성가시고 불편한 일들로 가득찬 것처럼 경험될 수 있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대체하여, 우리가 시치미를 뗀 채 순결하고 착한 아이인 마냥 위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거짓의 안심이 창조된 것이다. 이와 같은 가상현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는 악습관이 몸에 배이게 되었고, 결국에는 더 빈번한 악질의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강함 및 고귀함의 증거인 마음을 망각한 대가로 거짓의 안심을 제공할 문명을 더 견고히 쌓아올렸고, 이제는 그 문명의 명령어들을 마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마음은 선하다는 식의 얘기는 문명의 모든 명령은 옳다, 가 될 것이다. 그렇게 문명의 명령어에 따르고 있는 자신이 정말로 옳은 줄 알고 눈을 감은 채 집행하는 일련의 고통의 사건들은 책임의 주체가 없기에 질적으로 가장 저열한 것이고, 그래서 악질이다.
이처럼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생겨난 어떤 심리비용을 다른 이에게 대신 지불하라고 전가하는 문명인들이 이 시대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이것은 새로운 야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악질은 결국 이 새로운 야만의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단 하나다.
우리는 이 새로운 야만으로부터, 악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것이 아마도 이 글에서 가장 유용한 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보자.
악질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악질을 이기려 하거나, 악질과 타협하려 하거나, 악질에게 호소하려 하는 그 모든 방식은, 다만 우리가 악질에 더욱 매이게 되는 현실만을 만들 뿐이다. 흡사 우리가 당위적으로 악질을 필요로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악질의 중요도만 높아지게 되는 일이다.
이것은 문명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동일하다. 우리가 더 많이 문명의 편의적 이득을 욕망하는 만큼 우리는 거기에 종속된다. 편의는 공짜가 아니다. 편의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에게 함께 늘어나는 것은 관리의 의무다. 욕망의 소재들을 더 많이 소유한 이는 그것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악질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악질로부터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심리적 이득이 중대하게 포함된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불안이 악질의 소재를 통해 조금이라도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면, 그 순간 악질은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약자는 원래 다른 이의 약점을 찾아내 상대를 더욱 약화시키는 일에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상호의존과 상호약화만을 거듭 반복하게 되는 이 상대적 방식을 니체는 분명하게 노예의 삶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길이다.
만약 우리가 이처럼 우리의 두려움 및 불안을 대신 전가하고 자신의 이득을 꾀하는 문명의 방식을 더는 쓰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그래, 내 마음은 내가 만나야지." 등과 같이 과장된 자기책임의 방식을 쓰는 것도 아니며, 다만 이 모든 것을 다만 상대하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이 방식은 이러한 표현과도 유사할 것이다.
악질을 향해서라면, "그래, 넌 그렇게 살다 죽어라."
우리 자신을 향해서라면, "오케이, 난 이렇게 살다 죽으련다."
두렵든, 불안하든, 또 아니면 그게 다른 무엇이든 이제는 무슨 상관일까. 거기에 대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다 피곤하고 성가시다. 됐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다.
마음을 알아주고, 살펴주고, 만나주고, 그딴 미친 짓은 다 됐다. 대충 살련다. 더는 쥐어짜듯 괜찮은 무엇처럼 보이려는 일은 그만. 이대로 됐다. 끝.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아주 본래적인 강성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 순간 쩨쩨한 기계부품이 아니다.
악질의 톱니바퀴와 그것들이 이루는 악질의 순환계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2000년 전 예수는 광야에서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악을 상대하는 법을 발견한 바 있다. 최고의 이득들을 제공하겠다는 악의 유혹 앞에 예수는 다만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됐어.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게."
그것은 우리가 기계부품이 되어야 얻을 수 있다고 가정된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이 없더라도 우리 자신은 강하다는 인간선언이었다.
상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의 답이다.
우리가 성가시고 피곤하게 끝없이 상대해야 할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악의 징후다. 악질의 마수가 펼친 거미줄의 기색이다.
먹이를 주지 말 것. 우리가 먹이가 되어야 할 이유는 더욱 없다.
그렇게 상대하지 않고 훌훌 자유로이 이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음.
그 어떤 악도 가리거나 훼손할 수 없는 가장 맑은 빛을 스스로 발하는 인간의 마음 바로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