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진짜 이유는 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외부의 대상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보다 작은 것 같아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고통의 대상보다 컸다면 아무렇지도 않을텐데, 그것은 고통의 소재가 되지도 못했을텐데.
고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작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도 함께 발견한다.
우리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아주 멋지고 큰 사람이.
여기에서 심리학은 탐구를 촉진한다. 우리가 왜 지금 우리를 작게 경험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색들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문제였다고 심리학은 명석한 진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 진단은 아주 빠르게 오해되기 시작한다.
'마음의 문제였다.'라는 표현이 '마음이 문제였다.'라는 오독으로 세상에 널리 퍼져간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는가? 마음이라는 문제를 풀려고 한다. 문제 있는 마음을 알아주고, 돌봐주고, 품어주는 방식들이 유행하고야 만다. 그렇게 마음을 해결하고 치유해주는 행위적 주체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이른다. 그러한 나는 아주 여여하고 평온하며 자비로운 어떤 속성을 내포한 것으로 묘사된다. 소위 신적인 나이며 우주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모 같은 나다.
심리학이나 마음에 관심있다고 하는 이들의 귀결이 다 이러한 나를 이루는 길로 수렴된다.
질리도록 끔찍하며, 소름끼치도록 힘겹다.
이러한 이들이 말하는 '마음'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염증이 난다. 제발 호박엿이나 먹으며 그 입을 닫아주었으면 좋겠다.
문제라는 것을 상정하여 그 문제를 푸는 일에 의존함으로써만이 우리가 그럴듯한 어떤 존재가 된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쩨쩨한 일인가.
우리가 꿈꾸던 큰 사람이란 그러한 것이었던가?
골방에서 또아리를 틀고 눈웃음이나 치고 앉아 작은 꼬마들 같은 형상의 마음이라는 문제나 해결하고 있는 그런 뒷방늙은이 같은 것이 정말로 우리가 그토록 되고 싶어했던 큰 사람의 모습인가?
큰 사람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이가 아니라, 문제보다 커서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사람 아니었던가?
마음의 문제라는 말을 다시 살펴보자. 마음에는 오직 단 하나의 문제만이 있다.
큰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그것만이 마음의 문제다. 큰 사람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어서 우리는 우리를 작게만 경험했다.
자기를 해결하거나, 풀어주거나, 수용해줄 그딴 쪼잔한 것이 아니라, 아주 힘차고 자유로운 몸짓으로 자기와 함께 저 땅 끝으로 달려갈 큰 존재를 마음은 만나고 싶어했다.
차라리 마음을 적토마와 같은 아주 멋진 야생의 명마로 비유해보자.
누가 그 말에 탈 것인가?
큰 사람이다.
말에 타고 자기 몸인 것처럼 신나게 달려가고 있는 바로 그가 큰 사람이다.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차라리 레드드래곤이며, 레비아탄이고, 어쩌면 크툴루일 수도, 또는 아 바오 아 쿠이거나, 요르문간드다. 인류가 상상해왔던 그 어떤 판타지의 거수보다도 더 거대한 그것, 그 장대한 생명성의 운동이 아마도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 사람은 그것보다 더 크다.
그것보다 힘이 세거나 더 유능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 아니다.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비유를 이해해보자. 인간은 작고 유한하지만 신 앞에 독대할 수 있는 입장을 허락받았다. 이것은 신 자신의 내려놓음이다. 너는 아무리 작은 먼지일지라도 나와 대등하다는 그 표현이다. 왜 그런가?
인간의 가슴에 담긴 거대한 사랑 때문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창조주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혁명이다. 만약 우리가 만든 AI가 우리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을 상상해보자. 그러면 분명하게 이해가 간다. 이것은 혁명이다.
인간은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던 그 사랑보다 더 거대한 사랑으로 신을 사랑하는 혁명적 현실을 창조했다. 그래서 신은 자신의 자리를 내려, 또는 인간의 자리를 들어 신 자신과 동급으로 위치시킨 것이다.
인간이 신 앞에 단독자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 덕분이다.
이 비유와 동일하다.
인간이 거대한 마음 앞으로 나아가 설 수 있게 만든 것은 그것보다 더 거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야생의 명마는 몸을 굽혀 큰 사람을 태운다.
그 큰 사람보다 이 우주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없기에.
오직 그 사람뿐이기에.
"하나뿐인 너를 사랑해."
이 말이 "네 문제를 해결해줄게." 또는 "작은 아이 같은 그 마음을 알아줄게." 또는 "그런 너도 다 수용해줄 거야." 따위의 말들과 정말로 동격으로 들리는가?
사랑에는 그 어떤 비교될 말이 없다. 절대적이다. 그래서 사랑이다.
우리가 큰 사람이 되기를 그렇게나 간절히 소망했을 때, 우리는 이토록 절대적인 사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음을 보느니, 마음을 느끼느니, 마음을 현존하게 하느니, "이 내면의 꼬맹이들은 내 마음이에요. 이제 내가 만나줄 거예요."라느니, 도무지 무슨 소리들인지.
우리는 그딴 소리들을 듣고 싶어한 적이 없다.
"너무 사랑해."
우리는 이 큰 소리를 내고 싶었다.
큰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마음은 이 사랑의 비밀을 담고 있는 아주 거대한 수수께끼. 그러나 궁리해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거대한 수수께끼인 인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앞에 수수께끼처럼 놓여 있음으로써, 우리가 바로 그 큰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은 알게 해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우리가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던 것이다.
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이 큰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