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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Sep 21. 2024

놀아야 산다 #4

"마음의 불경기"




  불경기는 마음에서부터 찾아온다.


  이렇게 말하는 일, 이렇게 바라보는 관점은 아주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



  우리는 대상적 사고를 하는 일에 지나치게 익숙해있다. 자신의 행복은 외부의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외부의 대상을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춤으로써 행복을 이루려 해왔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효과적이지 못했을 때는 결국 우리는 우울증에 빠진다. 대상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행복이라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것처럼 경험되는 현실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기 싫다. 무기력이 지배한다. 실은 몹시 화가 나있는 상태이겠지만, 화를 내봤자 외부의 대상적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뻔하기에 차라리 자기 안으로 침울하게 잠겨든다.



  ..



  이것은 어떤 인색함의 상태다.


  이제 자기 주변의 세상에는 관심이 없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자기를 좌절시키는 잠정적인 벽일 뿐인데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신은 채권자다. 자신에게 관심을 제공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어린 시절의 엄마아빠처럼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머리를 굴려 더 많은 이들을 계산적으로 대하게 된다. A에게서는 이러한 이득을, B에게서는 저러한 이득을, 어떻게든 여러 대상들을 골수까지 탈탈 털어 자신이 최대치의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궁리를 한다.


  결코 포기되지 않는 지배와 통제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 그 의도를 숨기기 위해 예의바르고 친절한 웃음의 가면을 쓴다. 일부러 조금 어리숙해보이고 겸손해보이는 표정도 연출한다.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아는 독재의 아이들이 갖는 전형적인 얼굴이다.


  상대를 위해 조건없이 베푼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인색한 인간의 존재방식이다.



  ..



  외부세계가 불경기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인색해진 것이라는 변호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제 그 반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지금 이러해서 외부 세계에도 불경기가 온 것이다.


  요즘 심리학이나 철학들에서는 상호주관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다. 고작해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대상적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쓰일 뿐이다. 그러나 상호주관성은 바로 이러한 대상적 관계를 초월하는 현실을 뜻하기 위해 제안된 용어다.


  비가 와서 내 기분이 우울한 것인가, 아니면 우울해서 비가 오는 것인가?


  이 둘은 동시적인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인과관계를 구성할 수 있겠지만, 실은 알고리즘 같은 인과성이 아니다. 이것은 상관성이다. 인과를 넘어 동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서로를 보고 싶어하는 두 연인이 각기 문의 반대편에서 동시에 노크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된다. 이런 것이 상관성, 또는 상호주관성이다.


  그러니 외부세계가 불경기라 마음도 불경기라는 말만큼이나, 마음이 불경기라 외부세계가 불경기라는 말도 엄밀하게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술로 우리의 굳은 인식에 자극을 주는 일은 매우 유용할 것이다. 적어도 마음이라는 것의 중요성은 한결 새롭게 강조될 수 있다.



  ..



  부모를 자기 생각대로 조종하고 지배하려다가 그 뜻대로 안되니 마음의 벽을 치고 토라지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인색함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의 불경기는 이처럼 매우 유아적인 지배와 통제의 의도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불경기란 실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를 조종하는 일을 포기한 아이는 비로소 놀 수 있게 된다.


  부모가 놀아주어야만 행복하던 현실에서, 이제 스스로 놀아 행복할 수 있는 현실로 이동한다. 마음의 곳간이 스스로 채워지는 원리를 습득하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 목마름이 채워지니, 이제 대상에 의존하며 대상을 남용하는 일도 자취를 감춘다. 자신에게는 이제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확보된 까닭이다.



  ..



  스스로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도 분명 만연하다.


  요즘의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OTT, 게임, SNS 등을 통해 혼자서도 자신이 잘 노는 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 않다.


  이 미디어를 통해서만 노는 일이 가능한 상태는 부모가 있어야만 놀 수 있는 상태와 같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양육을 뽀로로와 꼬마펭귄 핑구, 토마스기차, 포켓몬에 위탁한 이래, 요즘의 아이들은 미디어에 의해 영육되어왔다. 즉, 미디어가 부모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미디어가 새로운 콘텐츠를 떠먹여주는 일은 엄마가 이유식을 떠먹여주는 일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는 이제 재미있는 일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아이들은 생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노는 일에 있어서도 무력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한 무력감에 비례해 더욱 커져간 것은 분명 통제에의 강박일 것이다.


  자신의 쾌락을 얻어내기 위해 부모를 조종하려던 일은 이제 게임기의 콘트롤러를 조종하게 되면서 한층 더 심화되었다. 미디어로 가득한 세상은 부모로 가득한 세상으로 경험되며, 곧 아이들 자신이 성공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세상이 된다. 게임메뉴얼에 따라 게임에 대한 더 성공적인 통제를 이루어가듯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동일해진다.


  자신에게 세상이 게임처럼 통제되어야만 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며, 세상을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은 마치 게임플레이어로서의 자신의 무능성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미친 듯이 화가 난다.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에게 화를 내듯이, 미디어에 양육된 아이들의 눈에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큰 분노유발의 소재다. 거의 막장의 똥겜[쿠소게]이며, 이런 똥겜을 자기가 플레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힘들다.


  자신의 진짜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세계로 데려가줄 트럭을 갈망하기에, 오늘도 이를 악물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빨간불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미필적 고의로 만들어질 기적을 꿈꾸며.



  ..



  세상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결국 우리의 내외부에서 불경기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창조성이 없으며,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없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더욱 쪼그라들고, 그렇게 자신감이 떨어지니 막연한 두려움만 커져간다.


  세상을 게임으로 보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NPC로 보고 있었기에 생겨난 일이다.


  자신을 태초마을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주인공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포켓몬을 수집하듯, 세간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 명품가방, 호캉스, 파인다이닝 등의 경험들을 수집해왔다.


  그렇게 많은 일을 다 했지만, 사람과 정말로 대화해본 적은 없다.


  NPC의 역할이란 자신에게 유용한 자원과 정보를 제공하는 일, 조금 더 나아간다면 자신이 동료로 삼아 육성할 수 있는 재미를 제공하는 일이다. 사람이란 그런 도구적 대상일 뿐이었지, 내 자신과 동등한 대화상대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 전까지의 대화란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이 이득을 얻어낼까의 궁리를 실현할 장일 뿐이었다. 고작해야 또 하나의 게임.


  정말로 대화할 때는 언어를 교류하는 것이 아니다. 이득 같은 것을 나누지 않는다. 나누어지는 것은 조건없는 마음이다.


  마음이 통한다.


  마음이 통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가장 완벽하고 온전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 더 필요한 것이 정말로 없어진다. 막연하던 두려움들은 다 사라지고, 세상이 내 편이 된 것 같은 아주 든든한 안심이 찾아든다.


  마음이 풍요의 영토가 된 것이며, 만인이 만인에게 인색하던 불경기가 끝난 것이다.



  ..



  대상의 반대말은 대화다.


  미디어는 대화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대상화한다. 그 통제된 대상화를 통한 쾌락을 제공한다.


  이 경우 마음은 닫히게 된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쌍방으로 열린 문. 쌍방일 때만 열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닫히면 불경기다.


  대화하려고 하면 그러나 열린다. 다시 열릴 수 있다.


  상대를 조종하고 통제해서 이득을 얻어내려는 고집을 포기하면, 대화는 가능해진다.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려는 의도를 내고 있는 이는 이미 인색하지 않다. 그는 마음의 곳간을 개방한 상태다.


  물론 그 곳간은 텅비어 있다. 하얀 도화지처럼.


  바로 그 자유의 무대가 개방된 것이다.


  자유는 남이 제공한 채널들 중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다. 무엇이 그려질지는 그리는 주체가 아니라 그림 자체가 결정한다. 정확히는 상호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술을 타고 가면 신기할 것이다. 별 노력도 안했는데 스스로 채워지는 것으로 보일 것이므로.


  통제하고 조작하려 하지 않을수록 스스로 성대히 실현되는 것.


  대상이 없이도, 그 모든 대상화를 초월해 스스로 이루는 것.


  그것이 마음이다.


  바로 이러한 마음의 운동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고자 할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 바로 대화다.


  대화를 통해 막힌 벽은 열린 문이 되어, 마음은 이제 통한다. 어디로든 통한다. 어디든지 통한다. 이루고 또 이룬다. 불가능한 것이 없다.


  대체 언제가 불경기였나? 까마득하리라.



  ..



  이 조건 저 조건을 달성해야만 내가 제대로 놀 수 있을텐데.


  엄마가 해리포터 레고 전시리즈를 사줘야만 나란 놈도 노는 일이 가능할텐데.


  아빠가 새로 나올 PS5 프로 30주년 한정판을 선물해줘야만 완벽하게 놀아볼텐데.


  이런 대상적 사고들이 불경기를 장기화시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이 대상에 달려 있다고 믿는 동안 우리는 늘 잠정적으로 우울한 마음의 불경기 속에 있다.


  불경기가 끝나야만 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노는 일이 불경기를 끝낸다.


  우리가 논다는 것은 마음이 자유한다는 것. 지금의 이 현실을 백지삼아 마음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어떤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다. 그런 조건의 달성이 아니다.


  마음은 원래 노는 것이 본성이라, 가만 두면 지금 이 상황의 현실에서도 놀 꺼리를 찾아낸다. 무감동하게 생각되었던 현실이라도 거기에 색을 더하고, 빛을 더해, 반드시 즐거운 현실로 바꾸어낸다. 이런 것을 마음의 힘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마음의 힘을 통해 '거기'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부터 행복을 시작할 수 있다.


  불경기가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면, 불경기의 끝도 마음에서부터다. 마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 곧 우리가 놀고자 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는 침체되고 우울했던 시절을 끝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는 대체 언제 무력했는가? 까마득하다.


  쓸데없는 궁리를 치우고, 가상의 미래에 대한 삼류소설 같은 망상도 갖다버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만을 한다. 지금 놀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논다는 뜻이다. 이 지혜의 빛을 밝힌 이는 영원히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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