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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Sep 19. 2024

수유천(2024)

취기의 현상학




  술에 취해 말하는 영화라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 대한 인상을 얘기한다면 어쩌면 틀린 말이다.


  오히려 말에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영화들이었다.


  아니 또 실은 사람에 취하고 싶어 그럴 듯한 말들을 술잔 속에서 건져올리려는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달밤 아래 강태공처럼 대화의 낚시줄을 술잔에 드리우며.


  어쩌면 월궁에 살고 있는 직녀일지도 모른다. 직녀가 짜고 있는 것은 언어의 패턴들. 반복을 작품으로 승화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그 반복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가 된다.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발생한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술잔을 앞에 두고 직녀처럼 언어들을 직조해낸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며, 그 말들에 스스로 취해 눈물흘린다. 자신이 쓰는 언어가 자신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언어로 만들어낸 자신에게 취해 술잔이 오간다. 왠지 통한 것만 같다. '도통'한 것인지 '소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취기로 말미암아 조금 더 진실하고 정직한 언어가 고백되며 그에 따라 어떤 본원의 순수한 자신이 드러나고 있는 듯도 싶다. 무슨 신비체험인 마냥.


  이것은 흡사 취기의 현상학이다.


  통상적으로 반복되던 것은 편견의 언어들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규정해내는 그 진리화된 인습들. 그 우악스러운 폭력.


  취기는 그 편견의 언어들에 제동을 건다. 에포케[판단중지]가 일어난다. 폭력이 잠시 멈춘 자리에서, 현상은 이제 편견에 굴절된 모습을 벗고 이제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말하게 되리라. 하얀 달빛처럼 순수하게. 그렇게 기대되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취기는 반드시 사라진다.


  신비체험의 상태는 지속되지 않는다.


  사라진 감동은 그래서 이내 강박이 된다.


  그것이 감동이었던 만큼, 순수한 상태를 지향하며 생겨난 새로운 편견은 기존의 편견보다 더 강렬하고 고집스럽다. 종교심리학의 체험적 연구들은 신비체험자들이 왜 더 강퍅한 성격을 형성하고 더욱 닫힌 현실에서 살게 되는지를 묘사한다. 체험이 그들 자신에게 절대적 진리성을 갖게 된 결과,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평가할 기준으로서 무엇보다 강력한 편견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취해 있는 동안에는.


  술에 취하고, 언어에 취하고, 체험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또 취기 자체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취한다는 것은 실은 끝까지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까지 가보지 않기 위해 어느 어중간한 자리에서 취기에 의존한 채 맴돌기만 한다.


  통속의 언어가 만드는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것만 같던 것이 취기의 언어라면, 취기의 언어란 예술이다. 예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무엇인가'로 건져올리고자 한다. 바로 그러한 내용의 '예술적 언어' 곧 '예술적 편견'이 구성되는 것이다.


  끝까지 간다는 것은 이 새로운 편견도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더 끝까지 뻗어보는 것이다.


  취기의 현상학은 이처럼 취기 자체도 넘어서고자 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영화에서는 말한다.


  "아무 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단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언어가 없다. 패턴이 없다. 편견이 없다. 그러니 취할 대상이 없다. 우리가 취기로 만든 그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영화에서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좋아할 수도 있죠."


  이는 뒤집어 표현하면 더 적절하다.


  현상학은 먼저 끌려서 시작한다. 좋아함이 우리에게 먼저 생겨나 있는데, 우리는 여러 말들을 만들고 그 말들에 스스로 취해 그 끌림의 운동을 가로막는다.


  이 끌림의 운동을 삶이라고 부른다. 현상학은 삶을 바로 보기 위한 방편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제 삶을 말하는 일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무의미한 말들로 말해진다. 그럴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말 자체는 엄밀히는 다 무의미하기에.


  무의미한 말들이 떠돌수록 말들의 권위가 해제되며 그 구속력이 사라진다. 편견의 강압이 사라진다. 임의적 패턴을 근거로 한 비난과 처벌의 평가가 사라진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자리가 포착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언어가 다 사라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자유다. 실존주의에서 묘사하듯이, 인간존재의 수원지는 바로 그 자유이며,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언어의 뗏목을 타고 하류로 흘러왔다.


  그러나 현상학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역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복이다. 우리는 언어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보다 먼저 근본적으로 강물 위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라는 이해다.


  표면적인 언어가 아니라 우리는 그 심층을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바로 마음을.


  좋아하는 마음을.


  실은 좋아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좋아할 수도 있는 그 자유를.


  그 마음을 눈치챈 어떤 이는 계속 영화를 만든다.


  이런저런 말들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삶을 그럼에도 한번 좋아해보고 싶어서.


  자신의 삶을 좋아할 그 자유를 정말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그러한 고백으로 영화를 계속 만든다. 그게 그의 삶이므로.


  취하려던 것은, 이내 취기의 끝까지 가보려던 것은, 삶에 깨어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깨어난 자리는 삶의 술잔 속, 우리를 음미하는 것은 삶이며, 우리에게 취하고 싶어하는 것도 삶이다.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좋아해보고 싶었던 우리를, 삶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어떤 발견의 순간은 분명 신비체험이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더는 하늘을 보지 못할 존재가 되어도 맑은 하늘이 비치던 것은, 하늘이 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고요하게, 좋아하며. 실은 상호적으로 서로 보고 있었던 것이며, 서로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적 시선이다.


  본다는 일이 다 이러한 것이라면, 우리는 표현 그대로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기만 했던 것일까?


  병신같은 자신의 삶을 그럼에도 한번 좋아해보고자 매일을 열심히 살아가던 그러한 우리를, 실은 아주 좋아한다고 하는 어떤 고백을 전해받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우리를 가르는 무수한 말들 너머에서, 영화라고 하는 문법구조 너머에서, 우리의 삶은 실은 그렇게 함께 만나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내 점점 커져간 하나의 고백으로. 환하게. 온전한 크기로 스스로를 밝히고 있었다면, 그것은 현상학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한번 좋아해볼 만한 삶이었고, 그러한 우리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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