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주의와 이완주의는 우리를 어떻게 슬프게 하는가"
"케 세라 세라."
"될 대로 돼라."
"어쩌라고?"
이 표현들이 오해되는 대표적인 방식은, 마치 이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마음을 경험해도, 즉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 상태인 것처럼 묘사되는 것이다.
물론 그 원의미는 그러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표현들이 활용되는 주된 방식은, 오히려 마음을 무시하고 망각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사실 이러한 표현들은 마음과 함께 흐르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효과의 향정신성 약물로 만들어진 인위적 상태를 묘사하는 데 더 적절하게 기능한다.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심신이 아주 가볍게 이완된 듯한 상태에서, 즉 마치 마음이 없어지거나 조금도 중요해지지 않은 것 같은 상태에서 발화되는 표현들에 가깝다.
"아, 뭐가 중요해. 어떻게든 되겠지. 난 몰라. 어쩌라고? 배째. 될 대로 되는 거지, 뭐. 케 세라 세라."
그래서 이 표현들의 형식은 마초주의며, 그 내용은 이완주의다.
그리고 그 형식과 내용의 양측면에서 이것은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거기에 있음을 알려준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과장된 위세를 보이며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초주의를 꿈꾸며,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해결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긴장된 심신을 편히 쉬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완주의를 꿈꾸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의 마초주의는 단지 강인한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뇌의 기능적 유능성에 대응하는 언어다.
때문에 이러한 현대의 마초주의를 추구하는 이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즐겨한다.
"난 천재니까."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같이 육체에 경도된 실제의 마초는 귀엽지만, 이러한 지성적 마초주의에 경도된 이는 사실 귀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성적 마초주의는 자기가 유일신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고, 사람들에게 마치 위대한 스승처럼 행세하려고 하는 속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묘사하면, 지성적 마초주의는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조종하려고 하는 의도를 갖는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채택되는 원리가 바로 이완주의다.
이완주의는 먼저 자기에게 적용되어, 약물이나 명상, 보디워크 등과 같은 여러 이완의 방법론을 통해 스스로를 이완의 상태로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그럼으로써 마치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천재대현자 같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위치짓고, 그러한 외적 권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완의 기제들을 보급하는 일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완주의의 주체는 사람들을 이완의 상태로 만드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즉, 사람들을 이완이라는 이름의 심신미약의 상태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실현하려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더 많이 심신미약의 상태가 되어야만, 자기에게 실제적인 두려움의 소재가 사라지고, 자기가 마치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능자처럼 행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마초주의의 형식과 이완주의의 내용을 활용하여, 다른 이를 심신미약이라는 잠정적인 두려움의 상태 속에 놓이게 함으로써, 그 자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의미다. 즉,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다른 이들을 자기에게 종속된 무기력한 노예처럼 만들어 자기의 두려움을 대신 떠넘기고자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마초주의와 이완주의가 결합된 이 '될 대로 돼라'의 기제는 결국 무수한 노예의 상태를 양산하게 된다. 곧, 인간의 호구화를 창발한다.
아주 쉽게, 가장 이완되어 있는 상태는 가장 조종되기 좋은 상태다.
따라서 '될 대로 돼라'의 기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 어떤 남에게 이용당하기에 괜찮은 상태를 만들어낸다.
즉, 자신에게 괜찮은 것이 아니라, 남에게 괜찮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누군가가 우리를 술에 취하게 해 아무 걱정도 없는 것처럼 붕 뜬 상태를 만들어놓고, 우리에게 500억 보증을 서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에게 술을 대접해 이 행복한 이완의 상태를 만들어준 그에게 심지어는 감사함까지도 느끼며 이렇게 말하게 된다.
"될 대로 돼라. 소심하고 쪼잔하게 굴지 말고 대범하게 가자. 두려울 게 뭐 있어? 해주지 뭐. 까짓것, 인생 한 번뿐인데."
그렇게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이 소중한 인생은 전락한다.
남의 먹이로.
이것은 중독의 기제와도 같다. 모든 중독재의 위협은 생리적 중독성이 아니라, 이처럼 인간을 정신적 호구로 만드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그 상태에 빠진 이가, 자신이 호구가 아니라 오히려 주도적인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결국 호구의 상태를 자각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일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호구로 만들며, 서로의 꼬리를 물려는 행위를 거듭 이룬다. 노예의 원이 그려지고, 그 안에서 착취와 남용의 현실이 영원히 반복된다.
두려운 현실이다.
가장 두려워하고 있으나, 그 두려움을 가장 소외시키려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처럼 두려움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장 소외시킬 때, 그 결과로서 찾아오게 되는 현실은 반드시 가장 두려운 현실이다. "될 대로 되라고 해. 난 두려운 거 없어."라고 하는 이가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 바로 이 가장 두려운 현실이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마음의 역설이다.
어떠한 마음을 소외시키면, 그 마음을 더욱 강력히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 끝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된다.
소외는 지배와 통제와 조종의 결과다.
즉,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조종하려고 하면, 그 마음은 더욱 커짐으로써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우리에게 엄습해온다. 마음의 역습인 셈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될 대로 돼라'의 기제를 통해, 자신이 경험하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조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정확한 결과로 남에게 지배되고, 통제되고, 조종되는, 곧 '남의 뜻대로 될 대로 되는' 현실을 얻게 된다.
그렇게 남의 뜻에 따라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복종하게 되는 노예의 현실이 펼쳐지니, 자신의 존재감은 상실되며, 끝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이에 따라, 현실은 늘 힘없는 자신을 위협하는 더욱 두려운 것으로 경험되기에 이른다. 그 두려움이 자신을 노예로 만든 그 대상을 더 의존하게 만들고, 의존할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지는 역기능적 순환을 이룬다.
이것이 지옥이다.
'될 대로 돼라'가 '남의 뜻대로 될 대로 돼라'로 오해되어 만들어진 지옥이다.
지옥은 언제나 자신을 포기했을 때 창조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경험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즉 마음을 무시하고 소외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음의 포기가 자신의 포기다.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 '될 대로 돼라'의 태도는 사실 '마음의 뜻대로 될 대로 돼라'이다.
마음을 가장 살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가장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경험하는 두려움이라는 마음은 이러한 뜻을 갖고 있다.
"여기 위험하니까 빨리 벗어나도록 하자."
화산 앞에서, 낭떠러지 앞에서,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는 이의 앞에서, 두려움은 우리가 정말로 안전할 수 있는 장소로 우리를 이동시키려는 기능을 한다.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두려움의 뜻대로 될 대로 되게끔' 자신을 허용하면, 가장 안심되는 안전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두려움이라는 알람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려는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기에 더는 기능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불 앞에서 두려운 마음은 안전을 원하지, 불 앞에서 괜찮다고 하는 이완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 앞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다 펼쳐서 억지로 이완되고자 하는 의도는 실상 그것과 싸우려는 의도다. 그것이 자기를 제압할 수 없는 것처럼 의연하게 이완된 태도를 취하며 버텨서 이기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그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혼내는 부모 앞에 버티고 있음으로써 자기가 부모를 이기려 하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다.
그런데 그렇게 마초처럼 버티고 있는 일이 실제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여러 이완의 기제를 통해 힘들지 않은 것처럼 신경을 둔화시킴으로써 버티는 일을 지속하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요약하면, 두려움은 두려움이 알려지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싸우려 하기 때문에 두려워지는 것이나, 그 사실을 망각하고 싸워서 이기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라는 망상을 품게 됨으로써, 버티는 싸움을 지속하려는 마초주의와 함께, 싸움의 피곤함을 상쇄하려는 이완주의를 동시에 발달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초주의와 이완주의에 담긴 모든 의도다.
영원히 끊이지 않을 처절한 싸움의 의도다.
무력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여 버티고 있으나, 그 버티는 행위로 인해 오히려 가장 무력한 호구가 되는 현실이 생겨나는 역설적 이유다.
마초주의는 아빠의 세력이고, 이완주의는 엄마의 세력이라고도 비유할 수 있다. 아빠 앞에서 버팀으로써 싸워 이기려 하는 이가 아빠와 똑같은 마초주의의 세력을 발달시키게 되는 것이고, 엄마 앞에서 버팀으로써 싸워 이기려 하는 이가 엄마와 똑같은 이완주의의 세력을 발달시키게 되는 것이다.
곧, 부모의 마초주의 및 이완주의와의 싸움에 의해 자기의 마음이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이가, 동일한 원리를 채택해 마음을 무시하고 소외하게 됨으로써 또 다른 싸움을 끝없이 창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끝없이 두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초주의 및 이완주의의 의도를 다시 한 번, 자기가 모든 것과 다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신이라고 착각하는 어린아이의 의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가 이 세상 모든 것의 위에 서있는 천재인 줄 아나, 그 실체는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인 무력한 미숙아의 의도다.
마초주의와 이완주의는 언제나 과잉된 표현이다. 과잉되게 센 척하며, 과잉되게 평안한 척하는 것이다.
과잉은 언제나 은폐를 위한 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어린아이가 과잉 속에 은폐되고, 그 은폐로 인해 결국 어린아이는 자라지 못하게 된다. 늘 미숙함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어린아이를 자라게 하는 것은 마초주의와 이완주의의 세력이 아니다. 즉, 아빠와 엄마의 세력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정말로 자라게 하는 것은 마음의 섭식이다. 마음을 많이 먹을수록, 즉 현재 자신에게 경험되는 마음의 뜻대로 될 대로 되게 할수록,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난다. 성숙한 존재가 된다. 그 자신이 된다.
우리에게 가장 슬픈 일은, 이 한 번뿐인 인생을 자신으로서 살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성숙하게 스스로를 펼치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꽃으로 태어났는데,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한 채 다만 남의 양분이 되어 무기력하게 시들게 되는 일이다.
이것은 두려움이라고 하는 마음의 소외가 낳은 마초주의와 이완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슬프게 만드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유일한 우리의 편인 마음의 뜻대로 되는 일을 거부하고, 우리를 착취하고 남용하려는 남의 뜻대로 되는 일을 허용한 결과, 우리가 대체 얼마나 슬퍼질 수 있는가에 대한 바로 그 이야기다.
이 시대에 범람하는 마초주의와 이완주의는 마치 부모의 세력처럼 '너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너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너를 위해서만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정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나를 위해서 활동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나의 마음뿐이다.
나에게 알려지는 그 마음만이 나를 위한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때, 우리를 그저 자기의 편의대로 이용할 대상으로만 삼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만이 우리를 찾는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말해주며, 우리를 향해 모든 여력을 동원한다.
'될 대로 돼라'가, 마초주의 및 이완주의의 의도로 작용할 때, 우리의 인생은 슬퍼진다.
'될 대로 돼라'가, 마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고백의 의도로 작용할 때, 우리의 인생은 거듭난다.
마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슬픈 마음은 우리를 슬프지 않을 현실로 안내하고자 하는 것이지, 우리를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남과 싸워 이기려고 그 앞에서 마초처럼 버티고 있음으로써, 결국 무기력하게 이완되어 남의 뜻대로 될 대로 된 현실 속에서 발견된 우리의 호구같은 모습이 슬픈 마음을 부른다.
더는 우리가 착취와 남용의 제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간곡히 외친다.
우리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버팀의 원리를 위해서만 작동하는 마초주의와 이완주의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시급하게 전한다.
절대로 버티지 말고, 자유롭게 떠나라고 말한다.
지옥에서 버티는 싸움의 미덕이 인생이 아니라, 지옥을 벗어나 우리 자신이 가장 행복할 자유가 인생이라고 모든 목소리로 알린다.
그 마음대로, 될 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