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아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왜 천재인가?"

by 깨닫는마음씨




자아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자아는 그저 이야기다.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이야기가 자아다.


자신은 어디에서 태어났고, 무슨 경험을 하고 자랐으며, 그래서 어떠한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등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고 있는 그 서사와 동일시된 가상적 주체가 바로 자아다.


그래서 자아는 과거의 산물이다. 서사로 구성되기에 좋은 과거의 개성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이 자아를 구성한다. 즉, 임팩트 있던 과거의 이야기가 자아를 구성한다.


임팩트는 상처로 남은 실패의 경험에서도 크게 경험되지만, 자원을 쟁취한 성공의 경험에서도 큰 비중으로 경험된다.


"난 이런 방식으로 해서 성공했어. 이것이 나야."


계속 자기를 보전하고자 하는 자아의 목소리는 대개 이러하다. 성공경험이라는 것을 붙잡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끝없이 소비하고자 하는 의지를 알리는 목소리다.


이처럼 자아는 지나간 과거를 박제로 만들어 영원히 반복하고자 하는 꿈을 꾼다.


박제가 된 과거의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어 우상화함으로써, 이 반복에의 정당성을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자신의 과거에서 어느 순간 성공적이었던 경험을 서사화해 끊임없이 그 이야기를 복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복제는 모방을 위해서다. 자아는 과거의 자기를 복제함으로써 과거의 자기를 모방한다. 그래서 자아는 근본적으로 자폐적이다. 자기만이 삶의 알파와 오메가다.


때문에 자아에 고착된 이는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성질을 갖는다. 남의 말을 듣는 유일한 순간은, 자기가 과거에 이룬 성공보다 남이 더 큰 성공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질 때다. 그렇게 자아는 남을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의존함으로써 자아 자신을 강화하고자 한다. 자아의 성공서사를 더욱 확장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자아가 성공이라고 판정하는 것의 그 모든 출발점이자 기준점은 결국 자기의 과거다. 그러니 자아의 성공서사가 아무리 확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서사가 시작된 지점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외연적으로는 성장인 것 같아도 그 본질은 언제나 퇴행이다. 자아는 반드시 과거로만 침습해 들어가려고 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과거의 자기 이야기와 늘 동일시되고자 하는 동세를 보인다. 때문에 모든 자아는 피터팬이다.


이러한 까닭에, 자아의 세상은 닫힌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새로운 소재라 할지라도 과거의 이야기에 근거한 자아의 판단기준에 따라 늘 환원된다. 자아 자신의 유아적 눈높이에 맞춰 모든 것이 자아의 수준으로 편집되는 것이다. 그러니 늘 동어반복이다. 새로운 미지에의 탐구란, 자아의 자폐적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늘 지루하고 답답하다.


자폐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가능성이다.


미지에의 탐구란 곧 미지에의 가능성이다.


이 미지에의 가능성을 개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아가 아니라 현재의 마음을 따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서사적 이야기로 박제화된 과거의 마음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늘 새롭게 알려지는 현재의 마음을 따르는 일이다.


현재의 마음을 따라 살 때, 인간에게는 더 넓은 가능성이 개방되어 비로소 실현가능해진다.


미지에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이 주인공의 이름을 바로 나라고 한다.


자아는 과거의 마음에 근거하고, 나는 현재의 마음에 근거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아 대신에 이 나를 얻는 일이다.


자아는 자기가 나인 줄 안다. 일찌감치 사라져 지금은 박제로만 남은 화석이, 자기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격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주인공은 나다.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는 나만이 이 시대의 주인공이다.


과거의 조건에 의존해서만 설 수 있는 자아와는 달리, 나는 지금 이 순간이기만 하면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나로 선다. 그러니 생존력이 탁월하다. 또한 과거의 이야기에 의존해서만 설 수 있는 자아와는 달리, 나는 이야기가 결코 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이야기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선다. 그러니 자존력이 우수하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자아에게는 생존 및 자존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까다롭고 어렵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아가 생존 및 자존의 문제에만 몰두하며 에너지를 과잉되게 소진하고 있는 동안, 나에게는 여유가 생긴다.


바로 미지를 섬세하게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새로운 것을 향한 탐구에 비로소 에너지를 가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는 천재가 된다.


천재란 무엇인가?


미지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이를 뜻한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를 뜻한다.


나는 왜 천재가 되는가?


아주 단순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미지를 향해 서있기 때문이다. 미지를 만나, 미지에게 물으며, 미지와 친해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지라고 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의 세례를 받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새로운 발상과 언행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미지를 향해 있는 인간은 자연스럽게 천재가 된다. 내가 천재가 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지적으로 우수한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학창시절에 공부를 많이 해서, 사회경험을 많이 쌓아서 등의 그 모든 서사적 이야기에 의해 천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아는 물론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노력과 학습이라는 모방의 기제를 통해 자아는 자기가 천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재의 조건은 오직 미지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지금 이 순간을 미지로 살아가는 조건을 달성하는 이는 누구나 당연하게 천재가 된다.


자아는 이렇게 쉽게 천재가 되는 일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럼으로써 부정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아는 오래된 이야기들의 위대성을 강조한다. 고대의 지혜라느니, 선각자들의 예지라느니, 아카식 레코드라느니 하는 판타지들로, 과거의 서사를 충분히 소비하지 않고는 인간이 천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인간보다 더 천재인 존재는 없다.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놀라운 것들을 지금 이 시대에 이미 자연스럽게 소비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인간이 정보의 차원에서도 가장 유능하면 유능했지 과거에 비해 모자랄 리가 없다.


과거의 이야기만을 이상적인 기준점으로 삼아 미화시켜 바라보고 있는 자아이기에, 그렇게 자기가 만든 판타지로 늘 자기 자신을 부족하게 만들고 있는 것뿐이다.


박제와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된 과거의 마음을 따라 살지 않고, 현재의 마음을 따라 사는 일을 실존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나는 실존 속에만 나이며, 실존하는 나는 스스로를 부족하지 않고 온전하게 경험한다.


자신을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이가 그 보상물로서 곧잘 꿈꾸곤 하는 것이 바로 천재다. 천재는 온전한 인간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천재를 꿈꾸지 않는다. 나로 산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천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천재적인 것에 의해 발전해왔다.


미지의 가능성을 현실로 실현하는 나에 의해 발전해왔다.


자신을 온전하게 경험하는 인간이 그 온전함을 늘 새롭게 외재화하는 창조적 활동으로 세상은 발전해왔다.


창조의 동력은 열등감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열등감은 과거로부터 비롯한다. 과거의 이야기에 근거한 자아로부터 비롯한다. 때문에 자아는 단 한 번도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적이 실은 없다.


아무리 자아가 노력을 거듭할지라도, 그 자가발전은 자아의 자위를 위해서만 쓰였을 뿐이다.


이러한 자아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해보자면, 아득한 사막에서 "이곳은 2500만 년 전에 번성한 강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파면 물이 나올 거야."라며 열심히 삽질을 하다가 자신의 시간이 다 끝나가는 순간에 "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지. 참 잘 살았다. 참 좋은 인생이었어. 물을 향해 한평생 성실하게 살다 간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었구나, 헛헛."이라며 비극적 미학의 미소를 짓는 모습과도 같다.


그동안 나는 그 사막에서 한 2km 떨어진 강가에서 손자와 같이 낚시를 하며 정겨움을 나누다가, 손자가 막 잡은 물고기를 화성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물질전송기로 보내며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손자와 함께 물고기를 낚아 올리던 그 호흡과, 손자의 얼굴에 가득 피어나던 그 웃음만은 생생하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나는 행복을 창조한다.


내가 창조하는 것은 바로 행복이다.


나로 인하여, 세상은 내가 없을 때보다 더욱 행복해진다.


물론 자아도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아는 행복할 수 있으며, 자기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아는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아가 만드는 행복은 언제나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의 절대량을 증대시킨다.


나는 왜 천재인가?


이 세상에 행복의 절대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천재다.


자아가 늘 똑같은 수준으로 동어반복하며 자동화된 공장의 프로세스처럼 돌리고 있는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나는 천재다.


인간이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나는 계속 천재다.


미지의 깊이를 탐구함으로써 천재의 깊이를 계속 파내려간다.


오늘날은 깊이있는 것이 기피되는 시대다. 깊이가 더 깊이 되어야 창조가 일어나는데, 깊이가 더 기피되면 창조가 멈추는 일은 당연하다.


창조 대신에 지루한 자아의 서사만이 반복적으로 소비된다.


이것을 대중사회라고 부른다.


대중사회는 '나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나를 참칭하는 자아의 서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다. 모두가 서로에게 "이제 고유한 너의 이야기를 해봐."라며 권면하지만 실은 동일한 자아의 이야기만이 반복되는 사회다.


그래서 대중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천재성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 정직하게는 다들 지루하고 답답한 까닭이다. 폐색적인 동일성의 반복을 끊고, 서사의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미지의 공기를 호흡하고 싶은 까닭이다.


물론 이것은, 대중에게는 천재적 우상으로 입지화된 인물이 필요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발상이다.


인물이 아니다. 바로 마음이다.


이 시대에는 천재적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천재적 마음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미지를 향해 서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누구나 지금 이 순간 나로 서고 있는 것인 까닭이다.


나는 왜 천재인가?


미지를 향한 나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천재다.


인간이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그 미지를 향해 나의 마음이 한곁같이 서있기에 나는 천재다.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 이 나라고 하는 천재다.


인간의 행복을 마음먹을 수 있는 인간이기에 천재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존재감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