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구마 일기
괜찮다면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해볼까? 전혀 아름답지 않은, 오히려 슬픈 밤이지만 말이야. 전체적으로 병x 같은 하루라도 부분적으로 예쁜 순간들이 분명 있었을 거니까. 어느 영화 대사를 내 맘대로 가져다 쓰자면 ‘막연히 나쁜 줄 알았는데, 구체적으론 좀 괜찮은’ 그런 하루일지도 모르니까. 쓰는 순간조차 아픈 날이지만 아름다웠던 것들을 가만히 떠올려 봐. 사실은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했던 나의 시선들을 돌아보는 거야. 밤은 부단히 버텨낸 하루를 아름답게 포장해서 달래는 시간이야 - 그리고 내일이 오겠지.
어디서부터 톺아볼까. 그래, 우선은 목동백화점에서 마주친 수많은 선남선녀들. 살을 맞대며 걷는 연인들, 마스크를 껴도 거리를 둘 줄 모르는 애틋한 마음들. 평일 낮을 수놓는 말랑말랑한 감정과 몸짓과 맞닿은 피부들, 그들이 차지하는 공간의 후덥지근함. 그들의 시선은 화려한 백화점의 장식과 조명에도, 화려한 옷이나 신발에도, 맛깔스러운 먹거리에도 오래 머물지 않았어. 공동의 공간 속에서 그들의 영역을 분리하고 서로만을 지키는 시선들. 나의 한 팔로 당신의 한쪽 어깨를 감싼, 겨우 1미터 남짓한 그들만의 좁은 영역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끼는 모습들. 예뻤지. 그런데 글쎄, 그들의 사랑은 나에게 막연했어. 타인A를 향한 타인B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이 주체C인 나의 한계였고, 그들의 예쁜 사랑은 나에게 평면적이었어. 물론 당신에겐 당신 옆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이고 입체적일 테야. 문득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어. 슬퍼지려 했고, 그래서 나는 다른 아름다움을 찾아 눈을 돌려야만 했지.
- 아름다움의 조건 하나, 그건 구체성이야. 아름다운-것은 내 곁에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되는 거야.
다음은 여의도역에서 만난 노부부. 조금 남루한 차림으로 각자 작은 등산 가방을 메고, 아주 느리게 걷던 백발의 부부를 마주쳤어. 개찰구에서 승강장까지, 그 짧은 거리도 꼭 나란히 서서 한참을 걸어야 했던 그런 부부였지. (노부부는 서로에게 가까이 있었지만 손은 잡지 않았어. 내겐 그 거리가 더 정겨웠어.) 왠지 모르지만 나는 조심스레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어. 곧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나왔어. 에스컬레이터는 한적했고, 부부는 역시 나란히 에스컬레이터에 올랐어. 나는 나란히 선 그들 뒤에 민망하게 서있었지. 그렇게 조금 내려가다가 기척을 느꼈는지 힐끗 뒤를 돌아본 노부인. 그들 뒤에 선 나를 보고 당황한 듯 몸을 움직이더니, “아이고, 늙은이가 젊은이 앞길을 막고 있었네. 미안해요.” 하며 얼른 길을 비켜주더라. 나는 왼쪽 노신사 뒤에 있었는데 노신사는 여전히 나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노부인은 자기가 서있던 오른쪽 길을 서둘러 내어준 거야. 나는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지나가버렸지. 그 뒤로 한참을 생각했어. 지나갈 이를 위해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는 지나간 이의 마음. 그리고 나란히 걷는 왼편의 당신을 위해 자신의 오른쪽을 내어주는 마음. 아름답게 늙는 일은 그런 것이고, 그렇게 늙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 그리고 느리고 희미한 그런 아름다움은 언제나 조금 슬프다는 것.
- 아름다움의 조건 둘, 그건 슬픔이야. 아름다움과 슬픔은 명도와 채도만 다른 같은 계통의 빛깔인 거야.
이제는 편의점이야.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인지 편의점엔 사람이 없었어. 무료한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알바생과 음료수와 빵 하나를 먹으며 앉아있는 나, 둘뿐이었지.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어. 날씨가 좋아서 걸음이 경쾌해 보였어. 그리고 그중엔 엄마와 아이,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가 있었지. 아이는 걸음마를 막 뗀 듯 엉성한 걸음으로 아장거렸고, 엄마는 아이의 작은 손이 쥘 수 있도록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내어준 채 느린 걸음을 맞춰 걷고 있었어. 엄마도 아이도 누구 하나 앞서지 않고 걷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책이었지. 아이는 곧 걸음을 멈췄어. 그리곤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거야. 아이가 무엇을 본 건지, 풀꽃인지 개미인지 햇살에 반짝이는 보도블록의 문양인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아이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어. 아무런 강요도 참견도 없이, 그저 주변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비둘기들을 경계하면서. 아이는 잠시 후 일어났어. 그리곤 웃으며 엄마에게 포옥 안겼어. 당신의 기다림에 감사하다는 듯 활짝 피어난 포옹의 순간. 그 따뜻함을 나는 기억해.
- 아름다움의 조건 그 마지막은 시간. 아름다움은 아무 기대 없이 흘러도 좋을 기다림의 시간 뒤에 비로소 온다는 것.
오늘은 많은 곳에서 많은 것을 보았어. 나는 그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으려고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지. 예쁜 것들, 혹은 슬프거나 정겨운 것들, 그래서 아름다움에 가까운 것들을 발견했어. 사실 그것들이 정말 아름다웠던 건지, 아니 온전한 아름다움이 어떤 건지도 나는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래도 오늘 하루를 슬며시 위로해준, 숨어있거나 모르는 척 드러나 있는 모든 아름다움에게 감사할 따름이지. 아름다운 얘기는 사실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설레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야. 오늘은 약간 설레는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잘 지냈어. 그러니 세상 모든 아름다움이 더 꼭꼭 숨어서 가끔씩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길, 그래서 슬픈 하루도 결국은 아름답게 끝나길, 나는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