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금요일이라서 오늘의 열차는 연착입니다.
차구마일기
금요일의 일그러진 표정들과 여전히 불편한 몸들과 오늘은 연착입니다.
우리는 알지. 금요일 퇴근길의 표정을. 어쨌든 다시 한번 지나간 주 5일 근무의 굴레를 벗어나는 날, 퇴근 시간 한참 전부터 우리의 엉덩이는 들썩거린다. 드디어 퇴근 2분 전. 여전히 미동도 없는 부장님과 갑자기 타자를 두들기기 시작하는 과장님. 내 마음은 타자기 소리에 덩달아 요동을 친다 – 부장님 슬슬 집에 좀 가시죠. 얼굴 가득했던 설렘에 초조함이 섞이기 시작해 도무지 숨길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 지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묵묵히 가방을 싼다 – 저는 일단 갈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퇴근이다. 회사를 빠져나와 지하철역까지 나는 조금 달려야 했는데, 6시 10분에 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놓치면 환승이 미뤄지고, 환승이 미뤄지면 귀가 시간이 30분은 더 늦춰지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은 이제 막 시작했고 일요일 저녁까지는 아직도 긴 시간이 남았건만, 오늘 저녁 겨우 30분의 시간에 대하여 나는 진심이다. 이 후덥지근한 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린다. 역에 도착하자 6시 8분. 시각은 정확하다. 아 – 진심은 두툼하고 묵직한 직장인의 몸도 한순간 가볍게 만들고,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는 인간의 정신은 이럴 때 위대하고! 정확한 시각, 승강장에 열차가 진입한다. 크~ 대한민국의 자랑이지, 대중교통의 정시성이란! 국뽕에 살며시 취하며 나는 그제야 금요일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무탈하게 환승역에 도착한다. 에스컬레이터를 슬슬 걸어 올라가면 1호선 열차가 타이밍 맞춰 승강장에 진입할 예정이다. 아무런 의심 없이 1호선 승강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하다. 이때쯤이면 다가오고 있어야 할 열차는 보이지 않고 전광판에는 ‘조정 중’이라는 표시만 떠있다. 오늘따라 승강장은 사람들로 지나치게 북적인다. 싱글생글 주말을 기대하는 생기 있는 표정들도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앱을 확인한다. 빨간색 느낌표가 달려있는 공지가 바로 보인다.
‘긴급 공지. 장애인 단체 시위로 인한 1호선 열차 운행 지연.’
아뿔싸. 식은땀이 흐른다.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익숙한 루틴이 어긋나는 순간 머릿속이 정지된다. 다시 한번 앱에 새겨진 활자를 훑는다. 문장이 한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나는 멍(청)해져 있다. 긴급, 1호선, 장애인, 시위, 지연. 뜨문뜨문 단어들을 읽어 겨우 뜻을 조합해본다.
‘나는 오늘 귀가가 늦어질 예정이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우선은 그런 뜻이다. 아까 뜀박질의 열기가 새삼 다시 올라오는지 땀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아까운 나의 에너지와 시간, 나는 무얼 위해 달렸단 말인가.
날씨가 더워서 그랬을까.
이 상황이 믿기지 않거나 믿을 수가 없다.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서 재차 확인한다. 장애인 단체의 시위, 그리고 그에 따른 열차 지연을 알리는 한결같은 내용의 기사들 아래로 한결같은 내용의 댓글들이 달린다.
금요일 퇴근시간을 덕분에 2시간정도 늦어졋네요^^
이런식으로 시위를 해서 사람들한테 공감을 얻어낼거 같으세요? ㅋㅋㅋㅋ
일부러 금요일 퇴근길 노린거같은데니들 때문에 기차도 놓치고 난리도 아니다집회하려면 주말 혹은 출퇴근시간대 피해서했어야지시민들이 상대로 뭐하는 짓거리냐
아 화나네 ㄹㅇ 다 반으로 접어버리고싶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방식으로 자기 주장만 한다면 진정한 지지를 받을수 없을 것이다
익명이 담보된 날카로운 문장들. 짜증 난 표정으로 마음속 칼을 벼리는 사람들. 아마도 내 주변에서 피어났을 댓글들과 그 댓글에 달린 공감의 손가락들이다. 지극히 비인간적이지만 그 또한 너무도 인간적인, 그런 사람들 틈 사이에서 나는 어떤 마음을 골라야 할까.
마침내 기다리던 지하철이 승강장에 진입한다. 뒤늦게 도착한 지하철에 이미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금요일 퇴근길의 사람들. 스크린 도어를 사이에 둔 이쪽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저쪽은 후끈거리는 지옥이다, 아우성과 지옥의 경계에서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뚱이를 겨우 지하철 안쪽에 밀어 넣는다. 결국 타지 못한 누군가는 남겨진다. 발 디딜 틈 없는 빽빽한 지하철 안에서 지하철을 타지 못한 바깥의 표정을 읽는다. 마스크를 쓰고 반만 내민 얼굴, 눈빛. 그들의 눈빛엔 동정과 위로는 없고 분노와 원망만이 서린다. 그런 표정만 있다. 궁금해진다. 내가 짓고 있었을 표정이.
예전에 지인들과 장애인 지하철 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더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조금 불편해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해줘야 하는 거라고, 아마 그런 말을 했던 거 같은데. 그날의 시위는 1호선에서 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 시각 나는 연착된 지하철을 기다리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즐거운 금요일 퇴근길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남의 일인 줄 알았던 사건이 나의 앞에 사실로 닥쳐올 때 악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무조건이라고 장담할 순 없어도 대체로 약자의 편인 사람. 함께 싸워주진 못해도 최선을 다해 이해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자던 나의 다짐들이 시험받는 하루를 보낸다. 그럴 수 있지, 이런 시위는 필요하지, 무언가를 바꾸려면 용기 있게 행동해야지.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쥐어짜내본다. / 근데, 왜 하필이면 1호선이지? 왜 하필 오늘이지? 꼭 이럴 필요가 있었나? 자꾸만 끼어드는 불만에 이번엔 마음이 멈칫한다. 흐르던 땀은 식었는데 원망이 은은하게 오래 남는다. 혁명과 저항의 상징이 된 가면. 그 익명의 가면이 짓던 냉소의 표정을 저항하는 자들을 향해 짓고 있는 나. 나는 그런 내 마음이 문뜩 무서워진다.
북적이는 지옥, 그날의 퇴근길 지하철엔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땀, 열기, 고통과 불편과 수많은 성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겪어온 일상을 겨우 하루치만큼만 그곳에 흘리고 간 흔적들이다. 시위가 끝나고 불편한 몸을 이끌며 귀가했을, 아마 누구보다도 고단하고 힘겨운 하루를 보냈을 그들은 지금 웃고 있을까, 아니면 울고 있을까.
날씨가 습하고 무더워서 그랬던 걸까, 그날의 표정들은. 그래서 그랬던 거였으면 좋겠다. 성났던 그 표정들이 이젠 조금 풀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