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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Jun 20. 2024

돼지와 무덤과 날아가는 새

연극 <새들의 무덤>

기억의 은유로서 새를 이용하는 것은 비행 때문이다. 걷거나 뛰어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 과거로의 항해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자유 비행을 통해서만 간신히 가능하리란 상상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새는 시간을 통과하며 난다. 그렇다면 날지 않는 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활공하지 않는 것, 걷는 새, 그것은 아마도 끔찍하게 슬펐던 과거로 이끄는 환상 속 안내자다. 우리가 그 새의 슬픈 뒷모습을 서둘러 좇는 것은, 슬픔을 정직하게 마주한 뒤라면 힘껏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다.


제45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새들의 무덤>을 본다.



용접 작업을 위해 극장을 찾아온 오루(서동갑)는 비행하는 한 무리의 새들 속에서 어린 새(강민지) 한 마리를 발견한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오루에게 선뜻 곁을 내주던 새는 그를 과거의 기억 속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어린 새를 따라서 오루는 자신이 겪었던, 그러나 잊고 있었던 면밀한 과거의 시공간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그 첫 도착지는 1968년의 고향 마을, 부모의 장례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애먼 돼지를 향해 집단적 광기를 뿜어내는 마을 공동체의 논리는 지극히 무속적이다. 일제강점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지주의 원혼이 돼지에 씌어서 복수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만드는 돼지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은 칼을 겨눈다. 공동체는 그 칼을 쥐어야 하는 사람이 지주 살해의 주동자였던 마을의 유일한 어른 수학(손성호)이어야 한다고 믿지만, 수학은 마을의 새로운 자본가로 군림하는 자신의 영예를 유지하기 위해 한사코 거부한다. 그의 아들 수필(김형준)은 그런 아버지를 비판하며 칼을 들고자 하지만 수학의 반대로 실패한다. 그 소동을 마무리하는 것은 수필의 조카 오루다. 얼마 전 부모를 여의었던 어린 오루는 해맑게 웃으며 돼지를 찌르고, 그 피를 마신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변절의 역사다. 적어도 <새들의 무덤>이 오루의 기억을 통해 내밀하게 그려낸 역사의 모습이 그렇다. 오루는 해방 이후 착취에 기대었던 경제성장기, 탄압 받던 독재의 시대, 허울뿐인 한강의 기적 시대를 거치며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는 분열되고, 개인은 치열해지고, 자아는 자기 자신을 배반한다. 민족해방에 앞섰으나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된 수학이 그랬고, 그런 아버지를 비판했으나 그조차 총을 든 자본가로 변모한 수필이 그랬고, 고향 마을을 위해서는 헌신했으나 다른 한 동네의 철거에 앞장서며 살아남은 판수(장재호)가 그랬다. 일제강점기에 땅을 소유했던 세력이 1세대 지주라면, 자본가로 변모한 수학은 2세대 지주고, 그의 자본을 이어받은 수필은 3세대 지주다.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그 이전의 이전 세대부터 존재했던 지주가 너무 많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지주의 역사다. 지주로 변절한 이들이 암흑을 드리운 역사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갔던 인물들의 일대기는 결코 시대의 어둠과 떼놓을 수 없을 테다. 마침내 비행을 시작한 어린 새와 묵혀뒀던 오루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어두웠던 절망의 시대상을 재발견한다. 극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돼지의 서사는 주술적인 동시에 은유적이다. 탐욕스러운 지주를 탐욕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하는 돼지에, 끝없이 반복되는 착취 구조를 질기게 이어지는 돼지의 씨에 빗댄 것. 지주의 영혼이 깃든 돼지의 저주는 오루의 대속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았고, ‘사람 죽이는 방식은 나날이 발전’하며 돼지의 씨처럼 질기게 퍼져나갔다. 누구나 일제강점기, 전쟁, 가난의 피난민이었던 한국의 근현대사는 모두가 돼지가 되어 돼지의 씨를 퍼뜨리는 변절의 과정을 거쳐 사람이 죽어나가는 ‘새섬’ 앞에 가라앉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 그것은 치욕과 탐욕과 변절로 점철된 지주의 역사가 도달한 비극의 무덤이다. 그곳에 아장아장 걷던 도손이 가라앉아있다.


자신의 일부를 끝없이 버려야만 살아남는 배신의 역사 속에서, 혹은 자신의 일부와 같은 존재를 잃어가는 슬픔의 시간 속에서는 누구나 반만 살아있다. 도손은 자신을 잃은 후 반만 살아있는 아빠 오루와 함께 무덤처럼 덮인 과거를 응시하고, 과거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힘차게 날갯짓한다. 이것이 비극의 마침표가 돼야 한다고, 이 죽음으로 끝이어야 한다고, 도손은 새들의 무리와 함께 별무리처럼 날아간다.


<새들의 무덤>은 한 개인이 겪은 압도적 슬픔을 따라가면서 한국의 근현대를 할퀴고 지나갔던 역사를 동시에 읽는다. 모든 역사는 개인의 슬픔으로 쓰인다. 이보다 나은 역사 교재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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