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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 young May 19. 2024

변화 1. 11년 만의 이직

신중에 신중에 기대를 더한

지금 허덕이고 있는 극도의 우울감의 원인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지난 1년간 나에게는 정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지금도 매 시간 우울함을 찌르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 난 지금 서울에 가장 번잡한 오피스타운인 광화문의 나름 유명한 빌딩 3층 공유오피스 내 방에 쿡 처박혀 있다. 생각해 보니 창문 없는 사무실에서 일해보는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서 일한 지 이제 만 5개월이 다돼 간다. 난 작년 말 11년 근무했던 회사를 떠나 2024년 첫날 새로운 회사로 이동하였다.

 나의 헤드헌터 경력에 반 이상을 보냈던 전 직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유명한 서치펌 중 한 곳이었다. 완벽한 직장이란 곳은 없지만 역량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내가 성장도 했고,  직원에서 임원, 숙련가에서 전문가처럼 한 단계 상승의 발받침이 되어준 조직이었다.


너무 오래된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커리어의 피크라는 40대를 커다란 변화 없이 보내고 있는 무료함이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불안감도 한몫했을 것으로 본다. 한참 무더위가 지난 늦여름, 몇 달 안 남은 올해가 가기 전에 새로운 기회도 알아볼까 싶어 나의 linkedin 프로필을 open to work로 변경하였다. 꼭 이직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내가 오랜만에 이직을 한다면 어떤 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였다. 나도 다른 이직자들과 다르지 않다.


처음 들어보는 회사의 대표가 연락이 왔다.  아주 작은 부티크펌이었다. 사실 이미 큰 서치펌들은 많이 다녀보기도 했고 당시 근무했던 회사가 업계에서는 제일 크고 유명한 곳 중 하나였기에 큰 회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좀 뻔했다. 오히려 내가 못 들어본 회사라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냥 그런 회사이거나 아니면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거나.


대표와 첫 미팅을 하며 주로 여기서 주도적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나에게 기대하는 일 등에 대한 진취적인 얘기들이 오고 갔다. 나도 첫 미팅을 진행하며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좀 더 주도적인 역할, 좀 더 유연한 업무환경, 좀 더 좀 더 좀더... 플러스가 되는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이유 없는 답답함을 풀어주기에는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나이와 경력은 많은 경우 용기와 반비례한다. 장점만 보고 무작정 달려들기에는 이미 수많은 명암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직장에서 답답한 부분이 새로운 곳에서는 해소가 될까. 큰 조직에서 한계가 있어 보이는 개인적 성장을 좀 더 유연하게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될까. 어디 가나 나 하기 나름 아닐까. 그러면 굳이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현재 직장에 머무른다면 그냥 안주하며 나의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몇 주간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만 길어지기 시작했다.


3주 후 대표와 직원 한 명과 식사를 하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누군가 나에게 제안을 한 것은 무척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기쁜 마음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만 행동한다면 고민이 덜 깊었겠지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거절을 했다. 어떤 도전도, 다른 말로는 리스크 테이킹도 이제는 주저하게 된 내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안전한 선택을 했다.


몇 달뒤, 다시 연락을 받았다. 편안한 식사 자리 제안이었다. 나도 좀 더 마음의 부담을 덜고 참석했다. 이런저런 업계 동향 및 업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어느 순간 이 조직에서 일해본다면 하는 가정 속에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마침 연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변화가 없으면 도태된다는 두려움이 강해지던 시기였다. 좀 더 구체적인 처우 및 업무 환경 등에 대한 내용을 조정한 후 나는 이직을 결심하였다.


11년을 다닌 회사에 퇴사통보는 쉽지 않았다. 익숙함과의 이별은 언제나 두렵다. 11년간 만들어 놓은 나의 기반을 두고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일단 몇 달에 걸쳐 신중하게 결정한 만큼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난 나는 연말에 퇴사를 결정하고 새해 첫날 새로운 곳으로 출근하였다.


누구나 처음은 기대감과 불편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첫 한 달은 새로운 고객사와의 미팅과 조직원들과 익숙해지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프로젝트들이 물밀듯 몰려왔다. 물론 상도덕상 전 회사에서 담당했던 고객사들은 무리해서 연락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프로젝트 수가 몰려 정신이 없다 보니 부티크펌의 인력 및 물리적 리소스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경쟁사가 막대한 데이터와 리서치팀을 기반으로 프로젝트를 빠르게 수행하다 보니 나 혼자 경쟁하기 버거웠다. 나의 물리적인 한계가 존재하다 보니 매일 야근을 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것이 매번 100%가 아닌 70% 정도에서 머무르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불경기라도 이상하게 중간에 엎어지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졌다. 일은 다 해놓고 결과를 보지 못하니 나도 미칠 지경이었다. 정신없었지만 성과가 없었던 만 3달을 보내고 4월 1일 월요일, 난 처음으로 출근하기가 싫어졌다. 물론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성과가 항상 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풀어갈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갑자기 내가 회사 조직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데이터를 갑자기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몇 달 동안 신중에 신중을 기해 어렵게 결정한 이직인데 짧은 시간 안에 무너진 내 모습에 가장 속상하다. 이렇게 몇 달 만에 내가 무너질 일인가 싶다가도 어떻게 이걸 뚫고 나아가야 하는지 답이 보이 지를 않는다. 무거운 기운이 나의 태도가 되어 버린 걸까. 지금은 그냥 무거운 공기 아래 창 없는 나의 사무실로 매일 끌려가는 느낌이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나와야 하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다. 모르니까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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