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 우울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sy young May 28. 2024

점을 봤다

삼재 + 아홉수 + 용띠

어떤 날은 좀 올라갔다 어떤 날은 더 꺼졌다 미미한 차이만 있을 뿐 우울함과 괴로움은 지속되고 있다. 궁극적인 나의 직업적 환경에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을 것은 알고 있는데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퇴근 후 멍하게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무슨 알고리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무속인의 "76년생 날삼재와 아홉수"라는 영상이 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지난 2년 반동안 삼재의 굴레에 빠져있었고, 아홉수였던 것이다. 


궁금한 것이 한참 많았던 2-30대에는 용하다는 점집도 찾아가 보고 별자리 점이나 타로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열심히 봤던 것 같다. 물론 의심 많은 성격 상 저 말은 나도 한다, 지나간 말은 누가 못 하냐 등등 머릿속에 거부감이 가득했고 좋은 말을 들을 때면 그래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지라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슬픈 일이지만 40대에 접어드니 크게 궁금한 것도 없어졌다. 다른 말로는 인생의 굴곡이 비교적 크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과 공허함이 함께 왔다고 할까.


그런데 내가 삼재였다니. 게다가 나도 모르는 아홉수는 언제 온 건지. 몇 개 영상을 보다가 한번 상담을 받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내 마음에 드는 보살님들을 픽했다. 어디서 누굴 모시고 있는 보살님, 편안한 언니 같은 인상의 보살님, 카리스마의 찍소리도 못할 것 같은 보살님 총 3명. 좀 과한 것 같긴 하지만 3명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평균값이 나오겠지.


하루에 한 번씩 3일에 걸쳐 점을 보았다. 내가 사주판을 떠나 있던 게 꽤 오래되었는지 요즘 시장가는 10만 원인 듯하다. 송금할 때마다 움찔움찔 하기는 했지만 그래 뭐 듣고 나서 해결점이 보인다면 다음 달에 좀 아껴 쓰면 되지 싶었다.


첫 번째 보살님은 일단 지금 마음이 많이 불안하시겠다라며 얼마나 불안하면 한밤중에 상담을 하냐며 위로해 주셨다. 마음이 편안하면 당연히 점은 생각 안 나는 거 아닐까요라는 나의 시니컬한 태도가 느껴지셨는지 "엄마가 좀 더 호응을 해줘야 신이 더 정확하게 얘기를 해주신다"라며 묻지도 않은 이런저런 연애얘기를 시작하셨다. "엄마 그거 알지,  엄마 같은 사람은 원래 우리 같은 일 해야 하는 사주야. 그런데 지금 안 하고 있잖아? 말로 많이 푸세요. 말하는 직업 가지고 글도 쓰고. 그래야 운이 트여." 지금 어느 정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직하고 일이 안 풀린다 그랬더니 9월 지나면 괜찮으니 좀 참으라 신다. 그리고 내년부터 정말 인생의 피크인 5-60대를 보내며, 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다 쓰고 간다고.


편안한 인상의 두 번째 보살님은 갑자기 내 성과 본관, 엄마의 성과 본관을 물어보시고 상냥한 목소리로 "방울 소리가 들릴 수 있어요 호호."라고 하셨다. 갑자기 파묘에서 봤던 요란한 소리가 5분간 이어지고 드디어 그분이 오셨는지 보살님이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셨다. "아이고... 그동안 힘들어서 많이 울었구나. 어떻게 이 많은 풍파를 버텼노. 아이고, 엄마 사랑도 못 받고 복도 못 받고 어쩌고..." 한동안 멀리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점을 많이 본 예전 기억이 떠오르며 이 기운에 밀리지 말아야지 하는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정성스럽게 구구절절한 보살님의 소란을 끊어버리고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의 직업운은 언제쯤 좋아질까요?"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뇨, 저 그만둬야 하나요?"

"니가 지금 안달복달 안해도 끊어지고 좋아지게 되어있어"

"언제요?"

"연말 가면 다른 데 갈 수 있어."

"9월은 안 되나요?"

"9월도 되는데 연말이 더 좋아. 이럴 때 굿하면 좋아. 아버지 천도재를 지내면 좋은데 비용은..."

햐. 이런 


세 번째 상담을 앞두고 유튜브를 다시 봤더니 용띠는 강한 동물이라 용의 해를 맞이하면 대박이 아니라 싸움이 난다고 한다. 삼재, 아홉수, 용띠 이 쓰리콤보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면 굳이 내가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는 희망 속에 이 돈을 들여가며 내 인생이 얼마나 힘든가를 들어야 하나. 환불해 달라고 연락이나 해볼까 싶다가 더 부정타지 않을까 하는 나약한 마음에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의 소유자, 세 번째 보살님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어차피 남의 말 안 듣고 사는 나의 기질을 너도 알고 신도 아시는데 뭐 하러 고민하냐.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이직, 이사 다 너무 빨리 결정한 면은 없지 않으나 이미 한 거 뭐 어쩌겠냐. 그냥 지금은 좀 견뎌야 하는 시기이니 올해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지내면 잘 방어한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작년부터 답답한 운세였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이 시기만 잘 넘기면 죽을 때까지 잘 지낼 거다. 타고난 운명과 기질은 좋은 편이니 그거 믿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그래서...이직은요?"

"9월 정도에 하면 되는데 그래도 당분간 힘들어. 그래도 버텨라. 그러면 내년 후반부터 완전 바뀐다."

"앞으로 1년 이상 더 힘들어요? 헉."

"그거 잘 버티면 평생 괜찮은데 1년이 뭐가 힘들어."


세분의 보살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여전히 회사에 가면 마음이 무겁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9월에 뭐가 있나 보다. 그리고 버티면 괜찮다고 한다. 어쩌면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다. 힘든 시간을 인고하고 나면 어떠한 형태와 크기가 되었든 간에 보상은 오기 마련이겠지. 힘든 고통이 사라질 시기를 알고 겪는다면 어느 정도 버틸 힘이 생기는 것은 나약한 인간이기에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아픔이 언제 사라질지 남보다 신통한 재능을 가진 또 다른 나약한 인간들의 말을 돈을 주고 들어보려고 하는 것이고.


적지 않은 돈을 써가며 3일간 3명의 보살님들과 이야기하며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무속신앙은 아리송하다.

2. 무당사주이지만 신내림은 안 받았으니 지금처럼 말하고 글 쓰는 내 직업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믿자.

3. 지금 내가 힘든 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지금 삼재에 아홉수, 용띠까지 겹친 상황에서 내 사주가 특히 힘든 상황이라 그런 것이다. 그러니 자학하지 말자.

4. 공통적으로 9월에는 변화, 이동수가 들어온다고 하니 그때 억지로 떠밀려 쫓겨나듯 움직이지 말고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만들어 놓자. 그 이후에도 힘든 건 당연하니 무조건 버티자. 그러면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편하게 살다 죽는다고 한다.

5. 천도재까지는 모르겠고 다음 달 아빠의 첫 번째 기일에는 산소에 가서 아빠한테 한번 물어보자. 나 잘하고 있냐고. 당연히 잘하고 있다고 하실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변화 2. 아빠와의 이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