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명의 전쟁고아들의 비밀실화,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시작.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전쟁고아들의 비밀실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폴란드로 보내진 아이들에 대해서는 70년 가까이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전쟁의 정점기인 1951년, 북한은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해외로 보낸다. 러시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 동독, 폴란드 등의 사회주의 동맹국가들은 한국전쟁의 고아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아이들은 다시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씩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동유럽의 국가들로 보내졌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당시 폴란드 교사들은 1500명의 아이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면서 아이들이 북한에서만 모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전선은 한반도를 오르내리면서 남한과 북한, 분단선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만들어냈고,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아이들은 그렇게 모인 우리의 아이들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전쟁고아 중 건강이 악화된 채로 폴란드 남서부의 땅끝마을 프와코비체로 비밀리에 이송된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이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의 이야기다. 프와코비체 양육원에는 300여 명의 폴란드 교사들은 프와코비체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는 비밀각서에 서명하고 비밀리에 아이들을 돌봤다. 교사들은 대부분 2차대전 중, 가족을 잃거나 고아 출신인 빈민들로 구성되었고, 이제 갓 교사 자격증을 딴 20대-30대 초반의 열정적인 청년들이었고 푸른 눈의 교사들은 프와코비체 기차역에서 검은 눈의 우리 아이들과 처음 만난다.
아이들이 처음 왔을 때, 몸에 여러 개의 기생충이 있는 아이, 얼굴에 화상을 입은 아이 등,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배어 있는 몰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땅, 서양인들을 향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교사들과 아이들 사이에는 폴란드어-한국어 사전조차 없었다. 그들은 바디 랭귀지로 소통을 시작했고 그 과정은 점차 답답함보다는 친근함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아이들은 종종 방학이면 이웃마을 르부벡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이들은 서로의 다름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아이들은 폴란드어를 신기할 정도로 빨리 배웠다고 한다.
담당의사, 담임교사, 체육교사, 미용사, 요리사, 보모 등, 프와코비체의 아이들은 그들을 돌보아주는 300여명의 스텝의 헌신으로 점차 정신과 육체의 건강이 회복되고 트라우마가 치유되어 갔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선생님이 아닌 ‘엄마, 아빠’라 부르게 했고, 아이들은 이 곳에서 잃어버린 집을, 가족을 찾으며 유년시절의 즐거움을 회복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1958년 동유럽에 흩어진 아이들을 전원 북송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1959년, 7월 31일 교사들과 아이들은 처음 만난 장소인 프와코비체 기차역에서 가슴 아픈 작별을 한다.
(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