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이미소 너 정말 할 거야?"
" 응. 이미 미진이한테 한다고 했어."
" 미친 거 아니야? 그럼 성현이는?"
" 성현오빠가 왜? "
" 너 몰라서 나한테 묻는 거 아니지? 너네 진짜 알콩 달콩했잖아. "
" 뭐래. 내가 언제?"
" 칫. 너 그러다 성현이 버섯머리한테 뺏긴다?"
" 피식"
요즘 들어 부쩍 기운 없어하고 멍 때리는 내게 미진은 자신의 남자 친구가 사정사정한다며 그의 남자 친구들과 3:3 미팅을 부탁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유달리 햇빛이 따갑던 6월 중순, 남색 통바지에 아이보리색 T를 입고 미팅에 나갔다.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들은 제법 포켓볼을 잘 쳤고, 말도 잘하고 위트가 있었다.
그가 3학년인지 2학년인지 어느 학교인지 들었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집으로 들어올 때쯤, 한 남학생이 전화번호를 물어보며 내 팔을 끌어 그의 품으로 당기려 들었다. 당황한 나는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 저 죄송한데 아직은 제가 누굴 사귈 마음이 없어요. 미안해요. "
" 뭐야. 씨발. 그럼 왜 나온 건데?"
다짜고짜 그가 내뱉은 씨발.
작지만 입에 찰지게 붙은 그 습관 같은 말.
그 습관처럼 욕이 베인 그 말이 꽤나 귀에 거슬렸다.
" 저 씨발 아니고요. 그렇게 저렴하게 말하는 거 보니 당신이 제 운명은 아니었나 보죠. "
" 아니 내가 씨발이라고 한 건 사과할게. "
" 나도 뭐 하도 황당해서 그런 건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에서 툭 튀어나왔겠지. 근데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듯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님 뭐 정중하게 거절하던지. 고작 씨발이 그렇게 아니꼬워? 니들은 씨발 뭐 얼마나 고고한 핏줄에 좋은 학교 다닌다고 거절이야. 그리고 뭐? 운명? 만나고 사귀어 보면 운명인지 아는 거지. 뭘 첫 만남에서 운명타령이야. "
" 뭐 적어도 첫 만남에서 욕하는 상대는 제 운명이 확실히 아닌 거 같아요. "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진이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소개해준 오빠의 결정적 한마디를 해줬고 그러자 그녀가 이내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며 그 오빠가 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만든 자리인데 자존심이 엄청 세고 지기 싫어하고 원래 질이 안 좋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란 둥 자기 남자 친구랑 절친이라는 둥의 이런저런 변명을 자꾸 해댔다.
" 미진아. 미안해. 내가 그런 말 들을 상황이 아니야. 미안. "
" 야. 근데 너도 나간다고 했잖아. "
" 그래 그랬지. 근데 난 처음 나간 거고 그 사람들 거기서 처음 본 건데 어떻게 처음보고 6시간 만에 내가 좋다고 고백하는지 나를 얼마나 알고 이해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그래서 그래. "
" 아 뭐 그렇다고 치자. 네가 그렇다는데 그렇겠지. 근데 너 아까 미팅 자리에서도 그렇고 너 좀 넋이 나간 거 같아. 너 혹시 딴 사람 좋아하는데 나 때문에 억지로 나온 거야?"
" 아냐. 그런 거. "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그랬나 보다. 보통은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지 않는데 꽤나 단호히 말했나 보다.
" 뭐야. 그냥 한 말인데 그렇게 화낼 일이야? 진짜 희경이 말한 게 맞아?"
" 뭐가? 희경이가 뭐라던데?"
" 아니다 댔다. "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대체 희경이는 나에 대해 뭐라고 하고 다니는 거야.
" 희경아. 너 도대체 나에 대해 뭐라 하고 다닌 거야?"
" 내가 뭘"
비상구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희경에게 다가가 말하자, 희경은 방금 문 담배를 끄고는 바로 나가려 했다. 그런 희경을 돌려세우며,
" 너 미진이 한테 뭐라 한 건데?"
" 야. 다 너 생각해서 한 거야. 네가 뭘 알아."
" 내 생각해서 한말이 뭐냐고. 친구랍시고.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고 다니냐고."
" 야. 내 눈에는 네 마음이 뻔히 보이는데 응? 속도 없이 거길 왜 나가. 나가길. 내가 그렇게 미진이 그년한테 너 나가게 하면 죽는다고 말했는데 고년이 그렇게 일러 받쳐? 이간질도 정도껏 해야지."
" 함부로 말하지 마. 지금 네가 한 행동이 잘못된 거야.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해?"
" 모르면 좀 알던가. 바보같이 굴지 말고 이 멍충아."
" 야. 니들 왜 이래? 희경아. 너도 말 좀 심하게 하지 마. "
" 현욱이 네가 뭘 알아. 네가. 미소가 성현이 두고 미팅 나간 마당에."
" 미소야. 너 미팅 나갔어? 잘 되었어?"
" 야이 멍충아.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김현욱 넌 눈치를 밥 말아먹었냐? 네가 그러고도 미소 친구야?"
" 어머 희경이 넌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어쨌다고."
" 미소... 소개팅 나갔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글거리는 눈으로 성현은 나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그러자, 현욱은 신난 목소리로,
" 아 성현선배 미소 어제 소개팅 나갔대요. "
그러자, 성현은
" 이미소 너 너무 한 거 아냐?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려 데생실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순간 머리 속이 멍해졌다.
'이건 뭐지. 이 알 수 없는 기분. 감정들. '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업 내내 내 머릿속에 반복 또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같이 화를 내며 돌아서는 성현 오빠의 뒷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멈추는 장면이 각인되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외면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내 마음이 어떤지.
감정을 외면하려 드는 것.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숨기기 힘든 마음. 그냥 평범하게 다가오는 마음을 받아주고 이해해 주는 것. 그 마음이 커지고 깊어져 주고받는 사랑이 되려면 내 감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들이 부담스러웠다. 상대를 이해하고 원 없이 마음을 받아주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정작 내 진심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행여 거절당할까 봐 혹여 상처받을까 봐의 문제였다면 나는 조금 달랐다.
내게 사랑은 사치와도 같았다.
수없이 좌절되어 온 꿈 속에 여자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뭐 하나 자유롭게 무엇하나 할 수 없던 사춘기 시절에 누군가를 향한 나의 응원은 당연한 것이지만 내게 보내오는 누군가의 친절이나 마음은 마치 벽과 같았다. 그래서 내게 친절을 베풀거나 마음을 보이려고 치면 나는 마치 철벽을 치듯 더 매몰차고 단호하게 끊어내고 있었다.
성현오빠가 그랬다.
처음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히 대해주고 내 이야기를 묻지도 않고 나를 위로해 줬을 때 혹여 내게 그에 대한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다가올수록 그를 더 멀리 밀어내며 온갖 핑계로 그의 마음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더욱이 현욱의 마음을 알고 난 이후로는 마치 핑계라도 대듯 더더욱 그랬다.
내게 성현은 나만 아니면 되는 나 대신 현욱처럼 그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사랑해 주는 존재이고 버섯머리 언니가 그 오빠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며 오히려 나는 마음을 비워야 하는 사람이라고 철저히 나 스스로의 감정을 짓밟고 있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 더 간절해지고 더 애틋해지기 마련인데 나는 달랐다. 마치 언제 그랬냐듯 타오르려는 감정에 찬물을 끼얹고 그렇게 연기를 내며 식혀갔다. 요란한 흔적을 남긴 채.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 그에게 준 상처는 고스란히 남았다. 그의 실망스러운 눈빛과 그의 화가 난 얼굴. 그리고 그가 내게 한 말. 외면당한 진심에 대한 상처는 깊고 잔혹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키우려 하지 않고 알려 들지 않은 것을.
주말 오후.
혼자 데생 실기실에 앉아 석고상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성현오빠가 들어와 아무 말 없이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석고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 선배.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공적인 공간이고 그렇게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다 보니..."
"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한 거 같아. 너에게 연락처도 안 물어봤고 네가 어떤 설명할 시간도 우리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하게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 온 것도 아닌데... 그날은 내가 너무 심했던 거 같아."
" 선배. 고3이잖아요. 선배 마음 알 거 같아도 외면해 온 거 너무 죄송해요. 하지만 선배.."
" 잠시만. 잠시만. 미소야. 응?"
그는 내 허리에 손을 얹고 머리가 복잡한 듯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 네가. 무슨 말하려는 지 알 거 같아. 나 너 보며 수없이 다짐했어. "
" 네가 네 미래를 위해 주말이며 평일이며 밤낮없이 그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에는 보였어. 너 일요일도 안쉬고 늘 시간 날때마다 그림 그리고 쉬는 시간에도 늘 공부하고 하잖아. 그래. 그 모습 보며 나도 내 마음 감정 다 잡고 집중하려 했어. 근데 미소야."
그런 그의 말을 나는 막아섰다.
" 선배. 있죠. 그래서 안 돼요. 이건 선배 미래예요. 아시잖아요. 힘들게 그림 시작한 거. 힘들게 지금껏 노력해 온 거. 그래서 더 외면할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에요. 우리 어리지 않잖아요. 전 그냥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오빠를 응원하고 싶어요. "
그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며 흐느끼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안될까? 네가 힘이 되어 줄텐데. 내게 아주 큰 힘이 되는데 안될까?"
" 안 되는 걸 보셨잖아요. 이미. 전 가까워지려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 버릴 거예요. 전 그런 사람인 걸요. 여기서 만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독이 될뿐이란 걸. 선배에게 응원하는 마음은 드릴 수 있어도 그 이상을 바라면 저는 더 차갑게 돌아서 멀어질 거예요. "
" 아냐. 내가 잘못했어. 미소야. 멀어지지는 말아 줘. 그냥. 지금처럼 그 자리에 있어줘. 제발. "
" 멀어지지 않아요. 선배. 곁에 있을게요. 그저 선배를 열심히 응원하는 후배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선배도 힘들게 준비하기 시작한 미래. 잘 이뤄갈 수 있죠?"
" 응. 노력해 볼게. 우리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자. "
그는 내게 기대어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허리에 올려진 그의 두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짐을 챙겨 화실을 나왔다. 밖은 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