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나는 정말 성현을 좋아하지 않은 걸까. 그가 보인 친절에 그가 보인 배려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절에 나는 흔쾌히 웃어주며 눈을 마주쳤고 그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그를 바라봤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어딘가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외면하려 든 것은 비단 현욱의 마음을 확인하고서가 아닌지 모른다. 화실에서 보낸 숫한 시간 속에 미래를 꿈꾸며 그려온 수많은 그림 속 그 시간 속에 나는 진심으로 그가 원하는 미래를 얻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미래를 내가 망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를 향한 마음의 진심은 이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더 그의 감정이 느껴지려 하면 나는 더 외면하고 더 돌아서려 했는지 모른다. 아직 나도 그도 서로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그 길을 외면하면 어떤 불행이 초래되는지 알기에 나는 더더욱 그를 밀어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 번쯤은 그의 마음을 그저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 걱정 미래 따위 안중에 없이 그냥 외면한 채 그렇게 감정이 흐르는 대로 받아들여도 되었을 텐데.
그러기에는 나란 인간은 너무나 이상했다.
고민이 깊어지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길 반복될 때, 전화가 울린다. 희경이다.
" 나야. 희경. "
" 알아."
" 오늘은 전화는 받네? 미소야. 전화 끊지 말아줘. 그때 말이야. 지난 월요일에 내가 너무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근데 너도 오해한 거 같아. "
" 알아. 네가 무슨 말하려는지. "
" 알아? 그럼 성현오빠.."
" 성현선배이야기는 그만해 줘. 나 진짜 마음 없어. 괜한 오해 듣고 싶지 않아. 그 이야기면 그만 끊을게."
" 아 아냐. 아냐. 그냥. 그건 내가 미안해. 다 미안해. 안 할게. 그 이야기."
" 그래 그럼 됐어. "
" 근데 너 밖이야? 차소리 들리는데... 어디야?"
" 아 좀 걷고 있어. 머리가 아파서..."
" 너 혹시 지금 또 비 맞고 있는 거야? 어딘데?"
"..."
집 앞에 다다르자, 희경이 우산을 쓰고 가로등 아래 기다리고 있었다.
" 야 너 다 젖었잖아. 이러다 감기 걸려. 미친년."
" 왜 왔어. "
" 야 이럴 게 아니고 어디 좀 들어가자. 안 되겠다. "
희경은 내 손을 끌고 만화방으로 향했다.
" 희경이 왔어? 어머 재는 왜 저렇게 쫄딱 젖었어? 미소 아니야?"
" 언니. 쉿. 혹시 담요 있어요?"
" 아. 음 잠시만. 여기. 뭐야. 사춘기야? 엄마랑 싸웠어?"
" 아 언니. 잠시만요. 여기 제가 볼 테니까 언니. 잠시만.. 네? 언니 볼일 없어요?"
" 응? 음.. 그래 뭐. 우리 민우 올 시간이 되었기는 한데... 그럼 네가 잠시 보고 있을래?"
" 네네 언니 다녀오세요. 제가 1시간 아니 2시간 정도는 거뜬히 볼 수 있어요.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 알았어. 너도 비밀이야. 알았지?"
" 네. 다녀오세요. "
만화방 사장님이 희경의 등쌀에 못 이겨 가게를 비우고 희경은 내게 따뜻한 커피를 가져왔다.
" 마셔."
" 고마워. "
" 야 너는 이 순간에 나한테 그 말이 나와?"
" 너 때문에 비 맞은 것도 아닌데 뭐. 그냥 심란해서. "
" 알지. 나 때문 아닌 거. 머 암튼. 어차피 넌 말해라 해도 안 할 거잖아. "
" 응."
" 칫 가시나. 그럴 줄 알았어. 넌 이 언니가 왜 그렇게 난리 쳤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 응."
" 야. 아 됐다. 그렇지 뭐. 너야 알아도 능구렁이처럼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어디 하루 이틀이야지. 사실 그날은 미안해. 정말. 내가 너를 너무 오해한 거야. 내 일 때문에. "
" 희경아. 그 얘기라면 좀. "
" 아냐. 들어봐. 네가 알아야 해. 이건 다 장원고 선배 때문이야. "
" 응? 그 선배가 여기서 왜?"
" 너 알지? 내가 버스에서 몇 번이고 쫓아다닌 선배. "
" 응"
" 사실 나 그 오빠의 비밀을 알아버렸어. 그날. "
심란한 듯 보이는 내게 희경은 비밀을 풀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무엇인가 말 못 할 일이 생길 때면 희경은 어디선가 나타나 내가 감당하지 못할 비밀을 툭 털어놓고는 했다. 그날도 그랬다.
희경이 시끄러운 집안일들로 속이 탈 때로 탈 무렵, 화실로 향하는 버스 안에 그가 있었다.
장원고 2학년 이우혁. 그는 희고 고운 피부결에 노란색 속눈썹과 햇빛에 유달리 빛나는 턱선, 뾰족하고 콧날이 오뚝한 꽤나 샤프한 외모의 얼굴을 하고는 창가를 여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나이 때 고등학생이면 응당 여고생이나 예쁜 여자들이 버스에 오르면 한 번쯤은 시선을 줄만 하건만, 그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남들에게 무관심하리 만큼 무관심한 희경은 뭐 저런 재수 없는 새끼가 다 있어라고 생각했더랬다. 나름은 창림고 센터미모라 스스로 자부하는 희경님이 버스에 올라 주목을 한 몸에 받는데도 거들 떠 보지 않았다니까. 하지만 왠지 그런 그의 시선이 우수에 젖은 시선이 머문 곳이 문득 궁금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화실이 다가올 즘이면 그의 두 눈에는 가끔씩 눈물이 고였다고 했다.
그런 그를 뒤로 하고 버스에서 내리며 처음에는 미친놈, 그다음에는 이상한 놈, 그다음에는 시련을 당했나? 하는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사로잡을 때쯤 그녀는 화실에 오지 않고 그를 따라 장원고 앞에 내렸다고 했다. 그가 장원고에 내려 한참을 서성이다 다시 맞은편 버스에 올라 돌아갈 때 그녀는 같이 버스에 올라 불과 두 정거장 앞의 화실을 두고 그의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고 그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정원이 꽤나 넓고 큰 개가 반갑게 맞이하는 2층 집. 2층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그 빌어먹을 언니년이 자살을 한 날이었다.
유서 한 장도 없이. 안방에서.
어쩌면 그 일이 그녀를 더욱 그에게 몰두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쯤 해서 희경은 부쩍 말이 많아지고 내게 더 가깝게 지내며 수다스러워졌던 거 같다. 돌이켜 보면 그녀가 버텨내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 같지 않은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탈출구. 사람마다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이 제각각이지만 그녀는 욕을 하고 부산스레 주변에 비밀을 옮기고 까발리기를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언니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고 그녀는 내 팔을 밀치며,
" 미친년. 이건 박수 칠일이야. 같이 욕할 일이라고. "
이렇게 황당한 말을 한 건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 또한 이해했다. 그녀의 쓰린 마음이 그녀의 떨리는 어깨로 전해졌으니까.
그녀가 버스에 오르면 늘 그 자리에 있던 그가 어느 날부터 안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불안해했고 그런 그녀가 화실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간 곳은 장원고 앞이었다.
화실 수업이 끝나고 30분 후면, 장원고 3학년 야간 자율학습이 끝이 났고 혹여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그곳에 달려갔던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색 승용차에 오르는 우혁 선배가 보였다.
그녀는 그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실에 갈 때면 화실용 봉고차에 오르지 않고 그녀만 혼자 버스에 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어 그동안 그 사람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그녀는 내게 연신 이어갔다.
그녀가 내게 달려와 그가 연락처를 주었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가 엉뚱한 대답을 해서 황당하고 했을 때 나는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가 그 후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어디론가 같이 가자고 말했다는 것을 방금 들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답장도 않던 그가 그녀에게 어디론가 가자고 한 곳은 시내 귀퉁이에 자리 잡은 민주 항쟁 기념탑이 세워진 공원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려간 그는 그곳에서 짧게 묵념을 하고 그녀에게 주는 줄만 알았던 하얀 국화를 그 위에 올려두고는 그렇게 말없이 돌아서 다시 버스에 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내 달려 화실 입구에 다다랗을 때 여느 때와 달리 토라진 그녀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 처음이야. 그곳에 누군가 데려간 건. "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에게 편지를 주고는 택시를 타고 자리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녀는 너무 설레어 편지를 미처 뜯어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버렸다고 했다.
" 왜?"
" 왠지 무섭잖아. 고백하기에는 그 장소가 의씨년스럽고 그렇다고 나를 차버리는 거면 읽고 재수 없으니까?"
" 너 진짜.... 정말... 미스터리다. 안 궁금해?"
" 미칠 거 같지. 내가 생각해도 나 좀 미친년이지?"
" 응."
그래도 그녀는 포기가 안되었는지 그를 따라갔다. 그날이 하필이면 내가 재민샘 집에서 뒤풀이를 하기 위해 모인 날이었다고 했다.
" 그래서 그날 내 연락 씹은 거야?"
" 아니 사실 난 다 포기했었거든. 버스를 타고 너랑 약속한 곳에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때마침 우혁이가 장원고에서 버스에 오르잖아. 그것도 경원대 방향으로. 집이랑 반대 방향인데.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어떻게. 막 고민하다가 근데 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나한테는 그 후로 전화도 없던 인간이. 혹시 대학생이라도 사귀면 어쩌나 얼마나 궁금하던지. 그래서 재민샘한테 전화했지. 너 몇 시쯤 도착하니까 좀 데려가 달라고. 나 못 간다고. 근데 네가 하도 전화하니까. "
" 그럼 그때 설명했으면 되잖아. "
" 야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그 말을 하냐?"
" 옆에 앉아 있었어?"
" 응. 직행버스라서 내가 앞자리 앉아 있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내 옆에 앉잖아. 그래서 아무 말 못 했지.
" 뭐지. 그 오빠?"
그를 따라간 곳은 경원대 대학병원이었다.
그를 차마 더 따라 들어가지 못한 그녀는 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고 막차시간이 다되어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그가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 그날 그 편지를 찢어버린 게 너무나 후회가 되고 안타까움으로 남았고 그런 마음이 성현오빠에게도 보였다고 했다. 그 마음을 외면하는 나도 보였고. 그래서 나만은 그러지 않았음 했다고 했다.
" 근데 희경아. 난 아니야. 진심. 난 그냥 성현오빠가 고3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 연애 따위에 한 눈 팔아 인생 안 망치고 그냥 정말 미래를 위해 전념했으면 하는 게 내가 진심으로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
" 야 네가 걔 엄마야? 누나야? 넌 뭐가 그리 복잡해? 암튼 넌 이상한 년이야."
" 내 얘기는 그만. 우혁인 그 후로 못 봤어?"
" 응. 학교에도 안 보여. 아는 오빠한테 물어봤는데 학교 안 다닌데. 원래 뭐 심장인가 신장이 안 좋아서 계속 결석하고 걸핏하면 빠지고 했었나 봐."
" 그래서 얼굴이 그렇게 창백했구나. "
" 창백한 거 아니거든. 희고 눈부신 거라니까."
" 알았어. 알았어."
" 어 그러고 보니 너 이제 기분이 좀 풀린 거 같다? 내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던?"
" 뭐래.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 뭐 이제 됐네. 나 이제 너한테 다 말한 거다. 왜 그런지. 그러니 너도 화 풀어 알았지?"
" 화야 뭐. 너 그런 거 알고 있었는데 뭐. "
" 이게 진짜."
희경은 나를 째려보았고 그때 마침 만화방 사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어? 인제 미소 다 말랐네? 밤늦었는데 집에 가야지? 자. 우산. 쓰고 내일 가져와. "
" 아 언니 고맙습니다. "
" 미소는 예의도 발라요. "
" 언니 가게는 제가 봤는데 뭐래요. 칭찬은 저한테 하셔야죠."
" 응? 그런가? 어디 보자. 손님이 하나도 안 왔는데?"
" 그 그런가? 아 언니 이제 저희 그만 가볼게요. "
후다닥.
급히 가게를 나오며 나는 희경을 돌아보았다. 희경이 내게 손짓을 하며 가라고 했다. 도대체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