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1년에 채워야 할 봉사시간 50시간 그 긴 시간을 채우기에는 고2의 일상은 학원이며, 학교며 야간자율학습이며 너무 빠듯했고 그 시절 우리는 방학이면 몰아서 봉사시간을 채우거나, 주말에 봉사활동을 나갔지만, 나는 주말마다 화실에 그림을 그리러 가거나, 동아리 활동을 다녀 채 틈이 나지 않았았다.
그래서 나는 방학을 맞아 2박 3일 지리산 어딘가 자리 잡은 중증 장애인요양원으로 동아리 아이들과 봉사활동을 핑계 삼아 여행을 떠났다. 아니 가서 보니 여행을 핑계 삼아 봉사활동 플러스 노역을 갔었다. 현실은 고 2 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봉고차 두 채에 빼곡히 올라탄 우리는 1시간 반을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달려 숲 속에 자리 한 요양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키가 훤칠하고 짙은 눈썹을 한 원장님이 계셨다.
" 어서 오세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단아한 음성을 가진 여장부 스타일의 원장님.
원장님은 우리 동아리 학회장의 이모셨고 그분의 자녀가 중증 장애인으로 판명을 받으며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이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난 뒤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서 지금은 15여 명에 가까운 장애인들이 이 시설에 모여 있었다.
나이는 10대에서 30대까지 다양했고 근처에 부모님이 사는 가정도 포함하여 오가는 인원까지 치면 30여 명이 되었다. 우리를 인솔한 학회장 부모님과 경원고 3학년 담임선생님 덕분에 흔쾌히 부모님의 수락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못마땅해하셨다.
" 제 몸하나 건사 못하는 놈이 어딜 가서 봉사활동이야. 얼마나 위험한 줄 알고."
" 봉사시간을 한 번에 채우려면 어쩔 수 없어요. "
조르고 졸라서 비굴하리만큼 한 달 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해서 겨우 얻은 시간들이다 보니 더없이 소중했다. 온 김에 보람차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리라.
" 우선 여학생들은 여기 여자장애인들을 중심으로 1:2명으로 맡아주시고 남학생들은 남자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1:2로 맡아 주세요. 여러분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선생님들이 안내할 동안 함부로 행동하거나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알았죠?"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없었던 그 당시에는 정말 희생과 봉사만을 위한 단체가 아니고서는 체계적인 교육이나 지도가 전무했고 우리 또한 아무런 사전 교육이 없던 상황에 그곳에서 2시간에 걸친 장애 이해교육을 듣고 약간의 낯선과 두려움으로 장애인들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순수했고 우리에게 친절했다.
낯설게 느껴졌던 그들은 단지 외모가 다를 뿐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고 그들의 생각과 각자의 개성을 가진 인간이었다. 오전에는 머리를 감겨주고 식사를 대신 먹여주고 책을 읽어주고 옆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같이 하고 오후에는 그들만 따로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이불을 빨고 방을 청소하고 텃밭을 정리하고 표지판을 정리하고 시설 곳곳에 손봐야 할 전구며 시설들을 고치는데 일손을 보탰다.
여학생들은 방을 꾸미고 칠판을 꾸미고 건물 한쪽 벽면에 예쁜 꽃들로 벽화도 그렸다. 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 이튿날 오후가 되자,
" 다들 내일이면 돌아가는데 그냥 가기는 너무 아쉽죠?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텐데 미안해요. 오늘은 근처 마을 분들이 장애우들을 돌봐주러 오시니까 여기서 10분만 내려가면 개울가가 있거든. 거기 가서 고기도 구워 먹고 4시간만 놀다 와요. 여기 선생님이 인솔해 주실 거예요. "
" 우와 감사합니다."
" 자 가자. "
산책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권익이 선생님께 쪼르르 달려가 말을 걸었다.
" 역사샘 샘은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저 진짜 놀란 거 아시죠? 샘 고3담임이잖아요. 학교에서 잘리는 줄 알았어요."
" 야 인마 이런 거로 잘리면 학교냐?"
" 그래도 샘 걱정 안 돼요?"
" 걱정은 무슨."
" 와 샘 진짜 멋지다. "
" 멋지기는 무슨. 아까 봤지? 샘물반에 노현성. 내 형이야. 이렇게라도 1년에 두 번은 보러 와야지. 다행히 교장선생님이 은사 셔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야. 학교 가서는 말하지 말어. 알았지?"
" 우와.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
선생님이 권익이에게 꿀밤을 때리자, 권익은 머리를 싹싹 문지르며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곧,
" 옛썰. 샘 멋지십니다. 앞으로 제 은사님은 선생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쪼르르 나와 정림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슥이며, 자랑하듯 선생님을 한번 뒤돌아봤다.
" 봤냐? 우리 경원고가 이런 전통 있는 학교다."
" 올 좀 멋진데? 너네 학교가 괜히 명문고는 아닌 거 같네?"
" 그렇지? 우리 학교에 말은 안 해도 봉사활동 동아리가 몇 개냐면.. 보자 하나둘..."
권익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열심히 세어댔고 그런 권익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경윤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 조심해. 넘어져. "
순간, 발을 삐끗해서 내가 기우뚱 거리는 데 불쑥 나를 잽싸게 낚아채는 손, 경윤이었다.
" 아 깜짝이야. "
" 야 괜찮아?"
정림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긋 웃어 보였다.
" 아 괜찮아. 내가 좀... 고마워. 경윤아. "
머쓱한 듯 경윤이는 머리를 쓸어댔고 어느새 우리는 옹기종기 자갈 밟기 좋은 냇가에 도착해 있었다.
검은색 차양막이 설치된 평상이 보이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손마다 거머쥔 봉지를 풀어놨고 그렇게 금방 한상이 차려졌다.
" 역시 삼겹살은 밖에서 먹는 게 제맛이야."
" 와 이걸 언제 이리 다 준비하셨대요?"
" 뭐 고기야. 이 마을에서는 항상 집집마다 준비되어 있어. 워낙 시내가 멀다 보니 마을 전체로 모여서 돼지를 잡거든. 그럼 모여서 나눠가져 가니까. 여기 요양원은 다들 올 때마다 꾸러미 꾸러미 가져다주시고 특히 요번에는 귀한 손님들 오신다고 마을 이장님이 특별히 니들 먹이라고 삼겹살만 골라주셨네. 많이 먹어. "
" 헤헤. 잘 먹겠습니다. "
갓 잡은 신선한 돼지고기는 구울 때 물도 나지 않고 입에서 살살 녹았다. 태어나 처음 먹는 신기한 맛이었다. 허기진 배를 허겁지겁 달래고 보니 애들이 하나둘 냇가에 들어가서 물놀이 중이었다.
"미소야. 너도 들어와. 정말 시원해."
" 난 사양할게. "
삐긋한 발목을 만지며 손사리 치는 나를 권익이와 다른 친구들이 달려와 번쩍 들어 냇가로 집어던졌다.
'첨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