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듣고 있어?"
" 아 응 말해."
그날 그랬다.
경윤이 내 입술에 물린 빼빼로를 물어간 날, 권익은 똑똑히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스치듯 지나간 그 입술이 기억났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경윤의 입술. 내게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그 입맞춤.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 그날 경윤이가 먼저 다 먹어버리는 바람에 내가 좀 강하게 나갔지. 얼마나 황홀해하던지. 전화도 오고 사귀자고 하고 피곤했어. 자꾸 연락하는 통에 한동안 집에서 전화도 못하고 핸드폰도 집에 두고 다니고. "
" 아 그래. 좋았겠네. "
" 뭐야. 이 비아냥 거림은? 그게 다야? "
" 뭐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데? 할 이야기가 뭐냐고?"
" 아 그게 음. 뭐더라. 아 아니 내 말은 괜히 그 일로 우리가 어색해지니까 너한테 전화하기 좀 그렇더라고. 괜한 오해 할까 봐. 그래서 전화 못해서 미안하다고. "
" 뭘 오해해. 이렇게 들었으면 된 거지. 뭐 아무 사이 아니라며?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니잖아. 그냥 편하게 통화하는 사이지. 안 그래?"
" 그 그렇지. 사실 너만큼 편하게 통화할 수 있는 여자애들이 잘 없지. 뭐든 잘 들어주고. 대답도 시원시원하게 잘해주잖아. 괜한 마음 안 먹고. "
" 그래. 그렇지. 그러니 이렇게 오래 너 수다 들어주지. 용무가 뭐야?"
" 아 그래. 너 집에 들어가 봐야지?"
" 응. 이제 우리 집 버스 정류장 지나가. "
" 아 다음 모임에 애들 조도 나눌 겸 상의도 할 겸 내일 보자고. "
" 내일? 왜?"
" 말했잖아. 상의하자고. "
" 너랑 단둘이?"
" 아니 정림이랑 경윤이랑."
" 아. 난 또. 알았어. 근데 애들 시간 되려나?"
" 될 거야. 경윤이는 당연히 되고. 정림이는 내가 전화해 볼게. 전화번호 좀 알려줘. "
" 그래. 네가 전화해 봐. 근데 너 정림이 전화번호 알지 않아? 지난번에 회장이 모임 회원들 전화번호 다 적어갔는데."
" 아 맞다. 그때 받았어. 찾아볼게. 있을 거야."
" 그래 알았어. 그럼 시간 장소 정해서 문자 줘."
" 알았어. 잘 들어가. "
" 응. 잘 들어가."
" 이제 들어오는 거야? 안 피곤 해?"
" 엄마 정말 피곤해. 보고 싶었어."
집에 들어서자 피곤이 물밀듯 밀려왔고 엄마를 보자마자 와락 안겼다. 그런 막내딸의 투정이 싫지 않은지 엄마는 가만히 서 있다 돌아서며,
" 어서 씻고 짐 풀어. 니 아버지 오실 시간 다되었어. 보시면 어딜 쏘다니냐고 잔소리하실라. "
" 알았어요. 어서 씻고 전 독서실 갈게요. "
" 저녁 먹고 갈 거지?"
" 당근. 저녁은 뭐 맛있는 거 해놨어?"
" 너 좋아하는 김치찌개 해놨어."
" 아싸. "
" 너 내일은 집에 있어?"
" 내일? 나 내일 일 있는데? 왜요?"
" 며칠을 집구석에 없었는데 또 어딜 가려고 그래?"
" 내일은 화실도 가고 독서실도 가고 해야지. 나 나름 고2거든?"
" 알았다. "
엄마한테는 진심으로 미안했지만 그날은 정말 신이 났다.
무엇보다 방학하고 첫 외출이었다. 사실 부모님께는 비밀이었지만 오늘까지가 화실 공식 방학이었다.
물론 내일부터는 방학특강으로 인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이지만 오늘 같은 날까지 화실에 처박혀 있거나 독서실에 처박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 여유롭게 오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원하는 책을 보고 점심때 만나기로 했으니 기분 좋게 걸어서 약속장소에 가면 되니까.
화창한 한여름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어도 여름의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 버스에 올랐다. 대로변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에 내려 천천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 올라가다 보면 시립 도서관이 나왔다. 도서관은 제법 장서들이 가득해서 입구를 지나면 책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조금만 지체해도 물론 도서관 자리는 사라지지만 오늘은 서둘러 나온 터라 자리가 제법 보였다.
뭘 읽을까? 고민하며 인문학 부분에서 둘러보던 차에 때마침 영원한 제국이 눈에 들어왔다. 저 책은 지난겨울에 날 밤을 새우며 봤었지. 음. 손가락으로 책을 하나하나 제쳐보면서 책을 고르는 기분이란 마치 마트에서 과자를 카트 가득 담는 기분이랄까. 인문교양으로 넘어오면서 예술 편에 이르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눈에 들어온다.
제법 두꺼운데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보느라 아직도 1/3도 못 읽어서 자꾸 거기만 가면 브레이크가 걸린다. 아 정말 오늘은 새로 들어온 책을 읽고 싶은데... 고민하던 찰나,
"이미소."
놀란 토끼 눈으로 돌아보자, 권익이가 서 있었다.
" 야. 네가 여기 웬일이야?"
" 쉿. 그런 넌?"
" 헐."
옆에 보니 경윤이도 서 있었다.
권익이는 고개를 돌려 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책을 고르려 들었다. 에이씨. 결국 곰브리치. 두꺼운 서양미술사책을 뽑아서는 도서관 자리 맞춘 곳에 가방과 함께 내동댕이치고는 밖으로 나왔고 그런 나를 권익이 졸졸 따라 나오더니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내민다.
" 열심힌데?"
" 야. 너 여기 웬일이야? 너네 동네도 아닌데."
" 나야. 당연 예쁜 여자애들 없나 구경하러 왔지. 우리 동네는 이미 내가 다 접수했거든."
저 넉살 좋은 자식. 말이라도 못 하면. 나는 손가락으로 중지를 세워 보이고는
" 용쓴다. 제발 좀 구해보던가. 그만 좀 동네방네 떠돌게."
" 그런 넌 들러리?"
옆에 서서 웃기만 하던 경윤이에게 묻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빙긋 웃는다.
" 뭐야. 그 애매한 표정은 진정한 들러리군."
" 아주 세트로 모함을 하는구나. 도서관에 공부하러 오는 거 아냐? 웬 독서?"
" 도서관에 책 보러 오지. 도서관에서 누가 공부하냐?"
" 미소야. 네가 모르나 본데 둘러보면 다들 공부한단다? 너 빼고?"
"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되게..."
고개를 빼꼼 내밀고 창가를 바라보자, 다들 수험서를 펴고 공부 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 그래 그렇다 치자. 공부. 그럼 난 인생 공부. 근데 이렇게 일찍 만나면 반칙인데. "
" 뭐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같이 놀라는 운명인거지."
" 뭐래. 아직 약속시간이 4시간이나 남았거든? 그리고 정림이 오려면 아직 3시간이나 남았어."
" 응? 정림이 12시 반에 온다고 했는데? 너한테 연락 안 왔어?"
" 응? 나랑 도서관에서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 아 그거. 나랑 통화하면서 바뀌었어. 오전에 과외 급하게 하게 돼서 12시 반에 보자고."
" 헐. 뭐야. 그럼 난 뭐 하고 12시 반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
" 뭐 하긴 학생이 공부해야지. "
" 효자 났네. 퍽이나. 니가? 야 어머니도 아시냐? 너 이렇게 재수 없는 놉인 거?"
" 불효녀 났네. 어머니는 아시냐? 너 여기서 농땡이 부리는 거?"
한참을 권익이와 내가 푸닥거리며 실랑이를 벌일 때 경윤이 그런 우리를 보며 웃었다.
" 풉"
" 이 자식이 너 비웃는 거냐?"
권익이 헤드락을 걸며 경윤을 괴롭혔고 나는 음료를 마시며 손을 흔들고는 유유히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한 삼십 분쯤 흘렀나. 책상 위에 누군가 쪽지를 남겨두었다. 뒤돌아 보니 지난번 소개팅에서 봤던 그 남학생들이었다. 쪽지에는
'이야기 좀 하자. 잠깐 나와.'
나는 종이를 구기고 못 본 척 그냥 계속 앉아 있었다. 뭐 할 말이 남았다고. 그러자 다시 와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내게 나오라고 고개를 까닥였다. 으. 나의 휴일을 이대로 망칠 수 없다. 나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 왜요."
" 너 뭐냐? 그 애들은?"
" 그쪽한테 말할 의무 없는 거 같은데요?"
" 그쪽? 너 남자 친구 있으면서 그때 나온 거야?"
" 뭐라는 거예요? 내가 남자 친구가 있든 말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 상관있지. 난 몹시 불쾌했거든. 그날. "
" 그날 저도 몹시 불쾌했어요. 그러니 우리 다시 얼굴보지 맙시다. "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내 가방을 낚아채었고 나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 순간.
" 괜찮아?"
휘청이는 나를 잡은 건 경윤이었다.
" 어 응. "
" 뭐야. 정의의 사도야. 남자 친구이라도 되는 거야?"
경윤이 내앞을 막아서며 나서려 할때 나는 그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 경윤아. 넌 좀 모른 척 해줘. 이건 내일이니까. 그리고 그쪽이 알바 아니니 그냥 두시죠. 가는 길 방해하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
경윤과 나를 번갈아 보는 남학생 옆에 친구한 명이 이내 화가 난듯 말했다.
" 헐. 적반 하장도 유분수지. 그날 일 사과해야 하는 거 아냐? 너 내친구 무시했잖아. 제대로 사과해. "
" 아. 네. 그날은 제가 너무 화가 나서요. 정말 죄송하게 되었네요. 됐죠?"
너무나 당돌한 내 표정에 어이없어하는 그들을 뒤로 나는 돌아섰고 그 중 누군가가 내 가방을 잡아채려 들었다. 그 순간. 권익이 잽싸게 내 가방을 낚아채 안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 튀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고 미친 듯 달려 내리막길 끝에 다다라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랐을 때쯤에야 뒤쫓아온 그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분에 차 하며 씩씩 거렸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통쾌함에 한바탕 크게 웃었다.
" 미소. 깡이 대단한데? 너 안 무섭냐? 재들 누군지나 알고 그렇게 달려든 거야?"
" 몰라. 재수 없는 놈들. "
권익이 물었다.
" 도대체 넌 저런 애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 말하자면 사연이 길어. 알려 들지 마. "
" 머 그래. 근데 왠지 좀 그런데 보통 애들 같지 않은데. 너 조심해야겠다. "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경윤이 물었다.
" 우리 어디서 내려?"
" 아 맞다. 어떻게 하지? 정림이?"
내가 권익을 바라보자,
" 이왕 이렇게 된 거 약속장소 바꾸지 뭐. 수업 중 일 테니까 내가 문자 넣어 둘게. 우리 시간도 이른데 영화관으로 갈까? 조조영화?"
권익이 말했다.
" 지금? 음. 그래."
나는 흔쾌히 수락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경윤을 바라보자 창밖을 바라보던 경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 길로 우리는 극장으로 향했고 극장에는 조조영화 상영준비가 한창이었다.
후다닥 표를 끊고 막 광고가 끝나가는 상영관으로 후다닥 들어가 권익을 가운데 둔 채 팝콘은 권익이 들고 우리 셋은 막 상영하기 시작하는 동감을 보았다.
스크린 너머 전해지는 아련함. 순수한 사랑의 마음들. 때때로 알 수 없는 안타까움에 눈가가 적셔오면 경윤은 목을 빼고 나를 바라봐서 당황해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렇게 영화가 끝난 뒤,
" 영화 재밌지? 잘 봤어?"
경윤이 내게 물었고 혹여 내 눈가의 눈물을 들켰나 생각에 나는 말끝을 돌렸다.
" 유지태 멋지다. "
그러자, 엉뚱하게 권익이
" 뭐야. 전지현 밖에 눈에 안 들어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