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거기 전지현이 어디 나오냐? 김하늘이 나오지. 넌 여주인공 이름도 모르냐?"
황당해 하는 나와 경윤이를 바라보더니 어의 없는 표정으로 권익이 말했다.
" 내가 모르긴 왜 몰라. 안 봤어? 우리 앞자리에 전지현 닮은 애. 진짜 이쁘던데. 대학생 같던데. 그 애 보느라 영화를 눈으로 봤는지 코로 봤는지 모르겠다. 아 아깝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걸. 진짜 미인이던데."
" 암튼 남자들이란. 변태시키"
내가 한심한 표정으로 권익을 흘겨 보자,
" 부럽냐? 그럼 너도 그 분처럼 이쁘시던가."'
" 뭐야?"
권익과 나의 푸박거림이 시작 될 쯤,
" 야. 전화 좀 받아. 권익아. 한참 찾았잖아. "
멀리서 정림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림이 평소 안 신던 뾰족구두에 하얀 블라우스, 이쁜 청치마까지 챙겨 입고 긴 머리를 찰랑 거리며 다가왔다. 고개를 숙여보니 흰색 운동화, 남색 청바지, 청남방을 걸쳤을 뿐인 내 모습은 왜 이렇게 초라해 보일까. 또 그런 나와는 너무나 달라보이는 정림이 오늘따라 유달리 빛이나 보인다.
" 와. 이게 누구야? 우리 정림이 맞아? 너 눈은 어딨어?"
나는 놀란 눈을 하며 두 손가락으로 눈가를 둥글게 그리며 말했다.
" 아 안경? 아빠가 생일 기념으로 컬러 렌즈."
그렇게 말하며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이국적인 회색 눈동자 위로 짙은 마스카라가 기다란 속눈썹을 더욱 풍성하고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 야. 너도 꾸밀 줄 아는구나.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 뭐야. 권익이. 몰랐어? 외출할 때 이 정도는 꾸며줘야지. "
" 와. 오늘 좀 한다? "
" 헤헤. 우리 뭐 먹을래?"
정림이 권익의 팔짱을 다정히 끼자, 권익은 갑자기 얼굴이 불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 뭐 오늘은 니들 먹고 싶은 걸로. 뭐. 돈가스 어때?"
" 야. 넌 맨날 돈가스냐? 가자. 우리 스파게티 먹을 거다. 여기 근처에 근사한 레스토랑 생겼어. 가자. "
정림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했다.
" 뭐야. 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서. "
" 돈은 걱정하지 마. 오늘은 이 언니가 쏠게. 오늘 우리 아빠한테 용돈 좀 받았다. 가자."
왠지 모르게 항상 단정한 단발에 뿔테 안경, 단정한 옷차림만 고집하던 정림인데 오늘은 여느때와 달랐다. 그런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정림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모처럼 기분 좋은 정림의 표정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와. 이거 웬 횡재야. 정림아 친하게 지내자."
" 그래. 미소야. 줄 잘서. 출발!"
제법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웨이터가 주문을 받은 뒤 한 손을 뒤로 한 채, 반짝이는 스텐 물병으로 멋들어지게 물을 부어주는 곳. TV에서나 보았지 이런 곳은 처음 와봤다. 마치 대접받은 기분.
" 주문은 내가 알아서 시킬게. "
익숙해 보이는 정림을 따라 우리는 모두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정림이 과외며 학원이며 공부에 원 없이 투자하는 것을 보며 있는 집인 줄 알았지만 오늘 보며 새삼 깨달았다. 정말 잘 사는구나.
" 근데 나 궁금한 게 너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왜 버스 타고 다녀?"
" 나?"
" 너 맨날 나랑 버스 타고 다녔잖아. "
" 그건 아빠랑 한 약속이야. "
" 무슨 약속?"
" 그냥 약속."
" 그게 다야?"
" 응"
옆에서 권익이 물었다.
" 더 없어?"
" 뭐가?"
" 뭐 그런 거 있잖아. 버스 타고 다니면 뭐 사준다더라. 아니면 '아빠 저는 버스 타고 다닐 거예요. 아빠차 타기 싫어요. 음 아님 뭐 그 돈을 다 용돈으로 주세요.' 뭐 이런 거. "
" 응? 그냥 고등학교 다닐 동안 버스 타고 다니라고 하시던데?"
" 그게 다야?"
" 응"
" 헐 대박이다. 너 진짜 효녀인 거야? 아님 생각이 없는 거야?"
" 둘 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환하게 웃으며 그녀 특유의 덧니를 뽐냈다. 저렇게 구김살 없이 웃는 그녀의 웃음 속 저 덧니는 왜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곧이어 그녀가 고른 메뉴는 종류별로 나왔고 우리는 주린 배를 원 없이 채우고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마저 순삭 한 뒤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온통 매미소리로 가득했다.
" 아 더워. "
" 여름은 여름이네. 레스토랑에서 더 버틸걸 그랬나?"
" 야. 샐러드를 그렇게 무한으로 먹고는 눈치 보여서 어떻게 더 있냐. 벼룩도 양심이 있지. "
내가 핀잔을 주자 권익은 멋쩍은 듯 머리를 슥슥 쓰다듬더니,
" 그럼 음료는 내가 쏠게. 우리 음료 사서 호수로 가자. "
그렇게 얼음이 동동 띄워진 생과일주스를 하나씩 입에 물고 우리는 시원한 분수쇼가 있는 호수로 향했다. 호수길을 따라 아름드리 드리워진 벚나무는 긴 그늘을 만들었고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했다.
" 그래서 조별 편성이 필요해. 알다시피 워낙 우리 학교 애들이 다른 여고 애들이랑 같은 조가 되고 싶어 하고 또 여자애들은 얼른 마치고 집에 가고 싶어 하잖아.
특히 무학여고 애들. 그애들은 학회장 말은 잘 듣는데 학회장이 안오면서는 내 말을 안들어. 근데 회관은 넓고 하필 전날 그 마을 축제를 해서 그곳이 정말 아수라장이 된다고 이장님이 신신당부하셨거든. 시간 꼭 지키고 먼지 한 톨 남기지 말라고. 정말 부담돼서 죽겠어."
정림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 음 일단 그럼 무학여고 애들 나누는 건 경윤이 네가 맡아. 애들이 모두 6명이니까 2명씩 나눠서 구역을 알려주고 이장님 전달 사항도 알려줘. "
" 내가?"
" 응 아무래도 네가 얼굴이 되니까 네가 말하면 애들이 네 말 잘 들을 거야. "
그러자 권익이 나섰다.
" 어쭈. 뭐야. 내가 부회장인데 왜? 그런 건 내가 말해야지. "
" 넌 좀 빠져. 결론은 무학여고 애들이 네 말 안 들어서 지금 우리더러 상의 하잖거잖아. "
" 그건 그런데. 뭔가 좀 기분이 그런데? 안 그래? 경윤? 나만 기분 이상한 거야?"
옆에서 경윤은 빙긋 웃었다.
" 봐. 경윤은 별이야기 없어도 한번 말하면 토 안 달고 또 말할 때는 정확하게 요구하는 바에 중요한 이야기만 하니까. 애들이 신뢰하잖아. 권익이 너는 너무 나대."
"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부회장인데"
" 그래 너 부회장이니까 너네 학교애들 맡으면 되겠네. "
" 그럼 너희는 너희는 뭐 할 건데?"
" 우리? 우리가 뭘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미소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을 꺾어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 음 우린 진행 요원할게. 청소 얼마나 되었는지 체크하고 분리수거 봉투 나눠주고 수거하고 모으는 장소 안내하고 봉사활동 체험지 나눠주고. 마을 이장님 책임지고. 그럼 되겠네. 어때? 권익?"
" 음? 그 그건 뭐... 생각해 보니 필요한 일이긴 한데 뭐지? 이건 뭐 밑지는 기분이 드는 건..."
정림이 박수를 치며 정리했다.
" 자 그럼 싹 정리 되었지? 간단하네. 그럼 그날 뒤풀이 장소도 정해서 같이 밥이라도 먹자. 방학인데. "
그러자, 권익이
" 오케이. 그건 나한테 맡겨. 마침 그날 우리 집이 비거든. 부모님 해외여행 가셔. 10박 12일로."
나는 너무 신기해서 물었다.
" 우와. 진짜 오래가시네?"
" 결혼 기념일이거든. 뭐 두분의 버킷리스트라고 같이 못가는 걸 너무 미안해 하셨는데 사실. 헤헤. 정말 좋아. 그 일주일은 나의 천국이지 천국. "
정림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 너네 여동생은?"
" 아 권애? 권애야 뭐. 같이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안 있으려 들걸?"
권익의 단숨함에 나는 어이없어 했다. 역시 오빠들은 저렇구나.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걱정도 안하다니. 옆에서 정림이 말했다.
" 헐 암튼 대박이다. 그럼 너네 집에 갈 때 우리 봉사활동 갔을 때처럼 삼겹살 파티하자. "
" 삼... 삼겹살? 그 그 정도.... 여유가 되려나...?"
" 고기는 걱정 마. 내가 우리 아빠를 구워삶아 볼게."
" 그래. 콜. 그럼 그대로 진행한다?"
" 아 바람이 시원하네. 난 몸만 가면 되는 거?"
시원한 나무 그늘에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 나도 모르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흔들며, 마치 신선이 된 양 말하자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주말 저녁 시간. 도로는 정체로 매우 혼잡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귀가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뒷좌석 근처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버스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 들었고 오늘따라 유독 흔들거렸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가방 끈을 불끈 쥐고 한 손으로는 버스 손잡이를 꼭 붙들었다.
여전히 팔이 긴 경윤이는 버스 손잡이 봉을 여유롭게 잡은 채 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서는 밀려드는 인파를 벽처럼 막아서 있었고 급정거를 할 때마다 내 주먹은 경윤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그러다 버스가 끼익 하고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경윤에게로 넘어졌고 그런 내가 넘어질세라 경윤은 한 손으로 내 팔뚝을 덥석 잡았다. 그 순간.
콩닥콩닥.
'이상하다. 가슴 소리. 이건 경윤이 가슴소리와 다른데. 어. 내 가슴소리...'
왜 갑자기 내 가슴이 나대는 거야.
한 껏 움켜쥔 경윤의 손아귀에 잡힌 팔이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아'소리를 내자, 경윤은 급히 놓았고 그러다 건널목에서 뛰어든 승객으로 인해 다시 한번 더 급정거를 하자, 손 쓸 틈도 없이 나는 그만 경윤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고 그런 나를 경윤은 한 팔로 나를 안았다.
그 순간.
더 큰 쿵덕쿵덕.
경윤의 가슴 뛰는 소리.
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왜?
" 미... 미안.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경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런 나를 되려 걱정스런 눈빛으로 경윤은 바라보며 물었다.
" 아냐. 괜찮아?"
" 응."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 났고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얼굴을 보이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 왜 이러지? 이렇게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날 일이 없는데. 천천히 고개를 들자, 창 밖에 정림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본 듯 안 본 듯 짓궂은 표정으로 내게 윙크를 하며.
빼곡한 인파를 요리조리 파고들어 버스가 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뛰어내렸다.
아뿔싸.
아직 집에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너무 당황해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본능적인 몸의 반응 좋지 않아. 터덜 터덜 땅바닥을 차듯 걸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연신 쥐어박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드니 경윤이었다.
" 어 너 언제 내렸어?"
" 아 밤 길 위험한데 막무가내로 내리길래. 너네 동네도 아니잖아. "
" 아. 그렇지. 아직... 좀 더... 근데 어떻게 알았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방긋 웃어 보였다. 눈을 마주치자 말자 현혹되지말자 되네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을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며 걷다 그 그림자 끝을 따라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봤다.
" 우와. 북두칠성이다. 오늘따라 유달리 빛나네."
" 북두칠성은 한 여름에 가장 빛을 내지. 근데 미소 너는 시력이 무지 좋구나. 난 잘 안 보이는데."
" 왜 안 보여? 저기 있잖아."
나는 뒤에서 묵묵히 따르다 어느새 곁에 서 있던 경윤의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북구칠성을 그려줬다. 그러자, 경윤이 손을 쓱 빼더니 다른 손으로 손목을 감싸며 손목을 돌렸다.
" 아 사실 나 눈이 안 좋거든. 그래서 잘 안 보여. "
" 그래? 근데 너 안경 안 쓰잖아. "
생각해 보니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안경 쓴 경윤의 모습. 그래서 내가 몰랐구나.
" 평소에는 써. 오늘만 안 쓴 거지."
" 렌즈 안 썼어?"
" 아 렌즈. 깜박하고 급하게 나오느라 안 썼어. 평소에 안경 쓰는 습관 때문에 종종 까먹어."
" 야 넌 눈도 안 좋으면서 그렇게 덥석 내리면 어떻게 하냐. 집에 어떻게 가려고."
" 괜찮아. 걸어가는 길은 알아."
그렇게 말하며 또 방긋 웃는다. 바본가. 맨날 나만 보면 실실 웃는다.
" 야. 넌 아무나 보고 그렇게 웃지 좀 마. "
" 응?"
" 아냐. "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문득 기다란 그림자가 사실은 내 그림자가 아니라 내 뒤를 따르는 경윤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왠지 장난을 걸고 싶은 마음에 폴짝폴짝 뛰며 그림자를 이리저리 밟았다. 그러자, 그 기다란 그림자가 느리게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였다. 가운데로 멈춰 선 내가 뒤로 휙 하고 돌아보자, 경윤은 멋쩍은 듯 하늘을 보고 서 있었다.
" 너 이제 집에 가야지. "
" 너네 동네야?"
" 응. 저기 버스 정류장에서 넌 버스 타면 돼. "
" 너 집까지 바래다주고. "
" 너 눈 없는 거 이미 들켰거든?"
" 걸어가면 돼."
" 야. 여기서 장원고까지 거리가 얼만데 걸어가면 내일 돼야 도착해. 내가 버스 번호 알려줄 테니까. 딱 타고 가. 알았지?"
못 이긴 척 경윤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고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간 뒤 그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 이거 타면 되겠다. 잘 가."
" 들어가면 전화할게."
" 응 잘 가."
막상 인사는 했는데 전화라니.
난 전화번호 알려준 적이 없는데. 잰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아는 거야?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상하다. 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정림이, 권익이, 학회장. 이렇게 인데... 권익이 알려줬나? 궁금증이 머릿속을 맴돌던 찰나, 문자가 왔다.
' 나 잘 도착. 잘 자.'
칫 전화는 무슨 괜히 신경 썼네. 그렇게 하루는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