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처음 마주한 누군가의 죽음

by moonrightsea

아침부터 화실은 부산스럽다.

1, 2학년 대생 수업 준비에 3학년 디자인, 수채화, 조소, 동양화, 정밀화등 실기수업 준비에 온통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열기를 내뿜는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이 넓은 공간이 갑자기 찜통으로 뒤바뀐 것인데 문제는 이 더위에 여름 한창을 돌린 에어컨이 고장 난 것이다. 한창 더울 때고 전력난이 오늘 내일 할 폭염이다 보니 에어컨 수리마저 언제 올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 자 더운데 다들 고생이 많아요. 그래도 이 더위를 참고 견딘 자에게 복이 있을 테니 학생 여러분 힘냅시다. 우선 창문은 최대한 열고 수업이 진행될 건데 조금 소란스러워도 집중해서 잘 들어주길 바래요. "


원장선생님의 말에 일제히 암막으로 컴컴하게 가려져 있던 실기실 창문을 열어졎혔다. 창문사이 더운 열기가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3층까지 늘어진 가로수들 덕분에 제법 양방향으로 바람이 간간히 불어 왔다. 물론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지만.

" 아 더워."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머리 위로 차가운 음료를 가져다 댔다.

" 마셔."


고개를 드니 성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늘 그렇듯 열심히 도망 아닌 도망을 다녔었는데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 정현언니가 안 좋아할 텐데... 이런 거. "




언젠가부터 그 버섯머리 언니와 사귄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그런 언니와 한동안 같이 다니며 어느 틈엔가 언니는 보란 듯 반지를 끼고 성현에게 받은 거라 자랑을 하고 다녔었다. 그게 벌써 2달이 다되어 가다니. 성현의 손에 그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 뭐 음료는 내가 진 빚도 있으니까. "

이해할 수 없는 말들. 내게 어떤 빚을 지었다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음료는 그다지 먹고 싶지 않다.

" 이야 시원하다. 미소야 이거 왜 안 마셔?"


" 아. 그거 현욱아 너 마셔."

" 그래도 돼?"

" 응. 내 취향 아냐. "


현욱은 어느 틈엔가 내 곁에 와서 손부채질을 하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음료를 마셨다. 이럴 때는 현욱이 눈치가 9단인데.


" 너 정말 괜찮아?"

" 뭐가?"

" 이제 말도 하길래. 한동안 성현선배 말도 못 꺼내게 했잖아. "

" 뭐 둘이 말 못 할 사이도 아니잖아. "


" 한 동안은 늘 피해 다녔잖아. "

" 내가 피하고 바란다고 사람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더라고."

" 그렇지. 그래도 성현 선배 꽤나 의리 있는 의리남이야. 난 그래서 존경하고 멋져. "


" 응?"

" 아냐. 암튼 너나 나나 성현선배한테 고마워해야 해."


" 무슨 말이야? 그 뜬금없는 말은?"

" 계집애 그런 게 있어. 아잉!"


현욱은 내게 살며시 주먹을 쥐고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로 향했다.

현욱옆 빈자리 희경의 자리였다.




방학을 하고 벌써 2주가 다되어 가는데 희경은 화실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는 안 가도 주말에도 화실에 오던 희경이었다. 평소에 아무리 늦어도 내 전화는 받던 희경인데 웬일인지 전화도 안되었다. 걱정이 되어 원장선생님께 물어보고 집으로 가봐도 집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어디 간 건가?'


갑자기 3학년 실기실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나더니 성현과 그의 무리들이 원장실로 갔다. 그 뒤를 몇몇 여자아이들이 따라 가나 싶더니 급히 성현은 실기실로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 성현오빠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

" 미소야. 미안. 나 상갓집에 가야 해서 나중에 이야기하자. "


" 누가 죽은 거예요? 같이 가요. "

그의 슬픈 얼굴에 나도 모르게 덥석 그의 옷깃을 잡았고 그는 천천히 내 손을 잡더니 나를 끌고 실기실을 빠져나왔다.


등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버스를 타고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원대 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식장을 들어서는 멀리 보이던 영정사진이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우혁의 영정사진.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황한 건 성현이었다.


버스에 오는 내도록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가 장례식장 입구에 도착하자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목을 가다듬고 눈물을 닦고 그렇게 담담하려 애를 쓰고 진정이 되고 발길을 옮겨 장례식장을 들어섰는데 정작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은 나였다.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하얀 배경에 희경이 말했던 상상 속 그들의 만남과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 장면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며 어지럽게 나를 흔들고 있었다.


" 미소야?"

장례식장 귀퉁이에서 다리를 움켜쥐고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있던 희경이 나를 불렀다.


" 야."

그런 희경을 보자마자 나는 그녀를 안고 엉엉 울었다. 그제야 그녀는 참아온 눈물을 쏟아내며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고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우리를 바라봤다.




" 이제 진정이 좀 된 거야? 넌 우혁이 어떻게 안 거야?"


희경과 내가 등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성현이 다가와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 음.. 그게 사연이 좀... 오빠는 어떻게...?"


" 고2 때 짝이었어. 저 녀석 때문에 내가 그림 시작했거든. 심장이식하려 한다고 학교 맨날 빠져서 거의 안 친했는데 막판에 친해져서 저 녀석 이야기 듣고 이왕 사는 거 하고 싶은 거 하며 살기로 마음먹었지. 저 녀석이 입버릇처럼 늘 말해왔거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것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런데 자기는 그 뜻있는 일조차도 하기 힘든 자신이 너무 가엽다고. "


조금은 이해될 거 같았다. 그가 희경에게 보인 행동이. 옆에서 그런 성현의 말을 듣던 희경은 연신 훌쩍이기 시작했다.


" 너 그래서 안 온 거야?"

" 연락이... 왔었어."


그녀는 한참을 쉰 뒤에야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처럼 새벽 별이 뜨는 걸 보고야 잠이 막 들려고 할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그는 거의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하고 했다.

희경에게 편지를 줬는데 아마도 희경이 계속 따라다니는 걸 보니 희경이 편지를 읽지 않은 것 같다며.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다. 희경이 편지 못 읽어서 미안하다며 다시 적어주면 안 되냐고 하니 그가


'네가 남은 내 시간에 들어온 것만으로 충분해.'

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묻지도 않은 채 그렇게 열심히 병실을 오갔고 그러다 하루는 집에 가니 희경어머니는 아버지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병원에 입원 한 뒤 이모네에 갔고 아버지는 감방에 갔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였다. 그녀는 다시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 나 미소병에 걸렸나 봐. "

" 응?"


" 너만 보면 고해성사를 하게 돼. 그래서 너 안 보려고 화실 안 간 건데."

" 이 바보야."

" 넌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 엄마 보다. "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성현이 희경에게 담배를 건넸다. 희경이 올려다보며

" 결국 피네요?"

" 응"

그렇게 둘은 담배를 핀 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 곁에 그렇게 아무 말 않고 자리를 지켰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언제나처럼.




말하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미쳐 목구멍으로 삼키지 못한 것들은 가슴에 묻어도 묻어도 안 되는 것들은 그렇게 툭 튀어나온다. 다만 항상 곁에서 기다림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 변치 않는 믿음과 응원의 눈빛이 필요하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응원하는 마음.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사람이 원하는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 내 마음에 내 어떠한 사심도 용납이 안 되는 마음.


그렇지 않은 마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너무 긴 시간 부모님을 지켜보며 자라왔기에 어쩌면 그런 내게 나 스스로가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때때로는 원치 않게 내속이 터지기도 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내가 보내고 내가 전하고자 했던 진심 어린 마음들은 천천히 거북이보다도 느린 속도로 그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화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와 버스에 오른 뒤,

" 사실 이 이야기는 성현선배가 나한테만 말해준 건데 내가 안 하려고 했는데..."


현욱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 내 곁에 바짝 다가와 말했다.

" 그 반지 말이야. 그거 정현누나가 준거라더라고. 반지 빼면 내가 성현선배 좋아하는 거 학원에 소문낼 거라고. "

" 그걸 어떻게 알고? 그거 나랑 너 밖에 모르잖아. "


" 그래서 사실 너를 의심했거든. 우리 둘이 버스 안에서 나눈 이야기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상했거든. 근데 왜 성현형이 그때 한참 전에 딸기 우유준 날 있잖아. 그 전날 실기실에서 둘이 있을 때 내가 사실은 고백했거든. "


" 응? 너 나한테는 그렇게 말 안 했잖아. 그리고 그때는 나도 몰랐는데?"

" 사실 그때 고백하고 형이 미안하다고 내 사물함에 너 좋아한다고 쪽지를 써뒀었나 봐. 그 누나가 그걸 본거야. 그래서 그걸 성현형 한테 보이면서 말하더래. 자기랑 안 사귀면 너 계속 괴롭힐 거라고. "


" 그 언니 나 안 괴롭혔는데?"




" 그게. 그 형도 화나면 보통 성격 아니거든. 디자인실에서 한번 재민샘이랑 난리 난 적도 있었어. "


"그때 왜 너 비 맞고 감기 걸리고 시험기간 겹쳐서 한 일주일 넘게 화실 안 나왔잖아.

원장샘 들어와서 막 난리도 난리도 아니었어. 그러고 잠잠하다가 우리 현장학습 갔잖아. 그때 나한테 너 부탁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못 간다고 하면서 너랑 잘되면 좋겠다고 했었지. 근데 그 담에 보니 손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물어보니 그러더라고. 받은 거라고."


" 그럼 둘이 잘되나 보지."

" 아니 그게 아니래도. 성현형이 그냥 반지 끼고 있을 테니 더는 너한테 신경 쓰고 자기만 보라고 했대. 그 누나한테. 자기는 너한테 관심 안 갖는다고. 네가 고3 선배로 응원하는 사이라 그랬다고 그랬다던데?"


" 응"

" 헐 너 바보냐?"

" 진짠데?"


" 야. 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안 돼? 남자의 진심이 보이잖아. 진심이."


" 너 남자 아니잖아.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도 그런 진심은 몰라도 돼."

" 에이 괜히 말했어. 난 네가 희경이 비밀을 뭔가 숨겨주길래. 난 또. "


"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

" 근데 왜 화실 안 나오던 희경이 나오냐. 그리고 왜 지가 성현한테 너 데려오라고 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냐?"




" 희경이 그래?"

" 그니까. 희경이 그런 캐릭터는 아니잖아."


" 음. 희경이 그런 캐릭터 맞아. "

" 헐. 니둘 원래 그렇게 친했어? 원래 희경이 너한테 치대는 거 아니었어?"


" 치대긴 뭘. 친구사이에."


뭔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현욱을 바라보다 문득 창문 너머 휙휙 지나가는 가로등불이 보인다.


우리의 시간도 저렇게 빨리 지나가면 좋으련만. 시간은 더디기만 한 거 같다. 몰라도 될 말들. 안 들어도 될 말들. 그저 외면하고 싶은 것들. 내 머릿속은 나보다 타인으로 가득 차 더 복잡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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