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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rightsea Nov 04. 2023

#1-33. 다섯 번째 별

베일 속 그녀가 안내한 곳

집에 돌아온 나는 집을 형수에게 부탁해 임대로 내놓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우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 채 되지 않았는데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그녀를 찾고 또 그녀를 만약 만난다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도록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숙소에서 가져온 짐마저 최대한 간편하게 정리해서 이삿짐 센터에 맡겼다. 그렇게 바쁘게 이틀을 보내고 오랜만에 캠핑카로 향하자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겨울임에도 바닷가에 사람들이 보였다.


부둣가 방파제에 앉아 낚시를 즐기고 가족과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사람들.

일요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는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고 " Autumn Breeze"를 틀어 두고는 진하게 커피를 한잔 내려 한 손으로 쥐고 한 손은 머리 뒤로 팔베개를 하고는 그렇게 늘어지게 음악에 심취한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불과 몇 달 사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린 그녀. 서우.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를 알기 전 내 인생은 그저 아무 계획도 아무런 미래도 고민이 없이 그냥 정해진 시간에 맞춰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그저 평범한 삶이었다. 무료한 오후가 그녀로 인해 설레었던 순간이 되었다 어느새 불안한 순간이 되었다 어느 날은 온통 머릿속에 가득 찬 그녀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는 나날이 지속되는 순간까지 나는 내 인생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었다.


하지만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닐수록 그녀에 대해 알게 될수록 나는 그녀와 더 멀어지며 더 내가 알 수 없는 세상에 발을 딛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창밖은 어느새 어스름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검붉은 바다가 집어삼켜가는 붉은 해는 마치 내게 주어진 운명을 예견하듯 그렇게 천천히 보름달이 차오르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아직도 서우 씨 찾아요?"


캠핑카에 노크도 없이 불쑥 얼굴을 들이 민 허사원의 말에 내가 놀라 바라보자 허사원은 붉은 립스틱에 짧은 미니드레스 위에 모피코트를 걸쳐 빼입고는 그렇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당신이 그걸 어떻게...!"


" 뭐 이 세계에 있다 보면 그 정도 정보쯤은... 후훗. 일어나요. 갈 곳이 있어요."

" 당신. 서우 씨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녀를 찾고 있다는 것도 어떻게? 누가 말했어요?"


내가 당황하며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자 은설은 내 손을 천천히 풀며 약간의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 후훗. 그럼 박경장 행방을 내게 말해주던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캠핑카에서 발을 뺀 뒤 어느새 쌀쌀히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캠핑카에 기대어 담배를 한대 물었다.


" 후우. 그리고 지금은 그런 질문할 차례는 아니지 않아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윙크를 하며,

" 서우 씨가 어딨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닌가? 그리고 아직 그쪽은 내 말에 답도 안 했고 난 그걸 말해줄 이유도 모르겠는데..."


담배를 끈 은설은 천천히 걸어 차로 향했고 어느새 캠핑장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스포츠카에 몸을 실어 시동을 걸었다. 나는 잽싸게 패딩을 걸쳐 입고 그녀의 차 앞을 가로막아 섰고 이내 그녀의 차창문을 두드렸다.


" 그렇게 말해버리고 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 후훗. 궁금하면 따라오면 되겠네. 따라온다고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그녀의 말에 나는 보조석에 올랐고 그녀는 내가 차에 타자 나를 한번 힐끔 바라보고는 찡긋 웃어 보인 뒤 이내 차를 몰아 바닷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 어디 가는 거요?'


" 잠자코 두고 보기나 해요. 하지만 이 차에 탄 이상 당신은 제게 증명해야 할 거예요. 당신이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길래 그들이 그렇게 당신을 궁금해하는지. "


" 그들?! 그들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요?"

" 후훗. "


내 말에 답도 않고 담배를 물고 해안가 길을 달려 운전하는 은설이 틀어 놓은 요란한 음악소리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끄라고 말도 못 한 채 이 상황이 도대체 이해가 안돼서 가만히 머릿속으로 생각에 사로잡혔다.

' 어째서 내가 미칠 듯 궁금한 상황만 되면 이 여자는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지?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은설이 몰던 차는 어느새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어두워 채 보이지도 않는 호숫가 별장으로 향했고 입구에서는 별장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제법 깊은 숲에 위치한 그곳.


 높은 철창 문 앞에서 은설이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자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리며 안으로 길게 길이 이어졌다. 입구에서 10분가량 차를 타고 들어서자 비로소 보이는 커다란 분수대. 그리고 그 옆으로 늘어선 스포츠카에 벤틀리 등 국내서도 손에 꼽히는 명품차 들이 빼곡히 주차장을 메우고 있었다.

 주차를 한 은설은 뒷좌석에서 양복집을 한벌 꺼내 내게 주며,

"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갈아입어요. 아 그리고 이거. 이건 지금 차에서 하고 내려야 해요. "





그녀가 건네준 건 은 백조 깃털이 장식된 나비모양의 가면이었다.  


" 들어가서는 절대 사람들에게 어떤 질문을 해서도 안되고 가면을 벗어서도 안돼요. 그리고 죽기 싫으면 내 곁에 꼭 붙어 있고. 혹시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이 있다면 대답을 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할 거예요.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


 차에서 내린 나는 그녀의 말대로 입구에서 안내 받아 게스트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문앞어서 기다리던  안내를 따라 게스트룸을 지나 서재로 들어서니 이내 은설이  다가와 나를 이끌고 아치형 창문이 보이는 창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서재의 제일 왼편 책장 다가가 책 한 권을 들어 책 속  책갈피를 옆의 책에 꽂은 후 뒤로 젖혔다. 그러자 서재가 뒤로 물러나더니 한 2m쯤 뒤편으로 문이 보였고 그 문을 열고 은설이 들어서자, 입구로 긴 복도가 보였다.


  벽면은 아방가르드 문양장식이 가득 찬 화려하면서도 거대한 19c 장식타일이 달려 있었고 그 위로 짙은 녹색의 벽에는 르네상스 시대 유명했던 천지 창조부터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카라바조, 루벤스, 게인즈버러 등의 명화가 걸려 있었고 마주 보고 있는 벽면에는 인상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와 '키스'의 클림트, 외설로 논란이 되었던 에곤 쉴레 작품까지 걸려 있었다. 한때 대학시절 짝사랑했던 미대생과 잘해보려 들었던 서양미술사 수업에서 보았던 작품을 실물로 보고 있자니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곳에 이런 작품을 전시해 둔 것도 아니고 그냥 걸어두다니.

이곳의 주인은 누구이며 뭐 하는 사람인 것인가. 저 작품들은 진품이긴 한 건가. 온통 머릿속에 의문만 쌓여 갈 때, 눈앞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 풍경이 드러났다.


 반 홀로 된 통창을 배경으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3층에서부터 길게 내려오는 둥근 돔 형태의 넓은 홀에는 화려한 파티의상을 입고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와인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고 벽면을 끼고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로는 전 세계 내노라는 산해 진미가 올려져 있었다.





 그 중심으로 둥글게 바가 마련된 채 디제잉을 하며 반은 통창으로 된 밤하늘이 올려다 보이나 싶더니 반이 가려진 천장 위로 홀로그램을 띄워 어두워진 벽면을 타고 디제잉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현대와 근대의 조화 같은 어색한 이 느낌. 그리고 이 안 어울리는 일렉트로닉 파티 음악까지. 혼란스러움도 잠시.


 어느새 나를 한 귀퉁이로 안내하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하던 은설은 저만치 물러나 한 무리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고 나는 웨이터에게 손을 들어 와인잔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웨이터가,


" You don't want this? You want this? "

" No. Thank's"


 웨이터가 권한 것은 마리화나 같은 담배 종류였고 나는 괜찮다고 대답을 한 뒤 손에 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어지럽기까지 했다. 와인치고 너무 독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잔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데 분명 홀 중앙을 기준으로 나와 반대편에 서 있던 은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나 싶더니 어느새 선명히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은설의 질문에 화려한 커프스를 매만지며

'우리 여기는 일 때문에 온 자리가 아니지 않나? 그런 질문은 삼가 주게. 누가 듣기라도 할 수 있으니.'


 분명 그는 입 한번 떼지 않고 은설을 바라보고 있었고 멀리서도 은설을 주시하고 있던 내 눈에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남자의 얼굴은 마치 확대되어 보이는 것처럼 뚜렷이 보였음에도 내가 눈을 비비고 보는대도 선명히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은설에게 다가가려 하자 조명이 어두워지며 다소 느린 탬포의 곡이 흘러나왔고 내가 천장을 보자 누군가 내손을 이끌어 내 품으로 안겨들 듯 다가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홀 바깥쪽을 따라 춤을 추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속삭였다.


" 여기 당신이 어떻게 온 거죠?"





서우였다.

한쪽 어깨를 감싼 검은 실크 드레스에 한쪽은 어깨선을 따라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두드러지도록 실루엣이 예쁘게 빠진 미니드레스를 입은 그녀. 가면을 써 얼굴을 가렸지만 분명 서우였다.


내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 쉿. 당신은 말하지 말아요. 당신을 데려온 사람이 보고 있으니. 잠시만. 이렇게 기댈게요."


서우는 천천히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그렇게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내가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자, 이내 그녀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 휴우. 잘 있는 것 봤으니 되었어요. 미안해요. 당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는데..."


 멀리서 서우를 바라보던 외국남성이 다가와 서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서우는 목례를 건넨 뒤 그의 손에 이끌려 눈앞에서 멀어져 갔고 어느새 우리를 주시고 하고 있던 은설이 다가와 내게 손을 건네며,

" 아는 척하면 안 되는데... 둘 다 실수했군요. 위험할뻔 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서우를 대신해 내 품으로 바짝 안겨들었다. 내가 궁금증에 못 이겨 입을 떼려고 하자, 은설은 한 손으로 내 입술에 손가락을 살며시 가져와 천천히 어루만지며 마치 내 입술을 탐하듯 검지 손가락으로 쓱 문지른 후 넥타이를 당겨 내 입술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 지금은 안 돼요. 알았죠? 여기 당신은 저의 초대로 온 거고 둘은 절대 알면 안 되는 사이니까. "

그렇게 말하고는 내 허리에 손을 감싸고 나를 이끌고 이층으로 향했다.


이층의 계단을 은설의 손에 이끌려 올라가다 서우를 어디로 데려간 것인지 묻고자 은설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다소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와 또다시 내입을 막으며 말했다.


" 알아요. 당신 마음. 어떤지. 쉿. 하지만 여기서 당신의 목소리를 내면 안 돼요. "


그렇게 말하고는 내 입술에 입맞춤을 한 뒤 웃으며 나를 이끌 눈동자를 굴려 사방에 걸려 있는 CCTV를 바라봤다.

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자 서우의 집에서 보았던 것보다 조금 큰 카메라는 녹색 불빛을 비추며 우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안내한 곳으로 향하자,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몸은 돌처럼 굳어지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지나가는 웨이터의 와인잔을 들어 한잔 들이켰다.


눈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난교를 펼치고 있었다. 여기가 한국이 맞는지 내가 아는 세상이 맞는지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그때 은설이 웃으며 내 팔짱을 끼고 어느 여성에게 다가가 팔을 쓰다듬더니, 내 팔에 그녀의 손을 얹게 하고 구석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 이제 당신 차례예요. 당신이 진정 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저들의 수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당신이 증명할 시간이에요."


머릿속은 한 없이 혼란스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잔뜩 긴장한 나는 멍하니 내 앞에 다가온 그녀를 바라봤다. 이름도 얼굴도 가면에 가려져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단지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둔탁하리만큼 큰 엉덩이를 가진 매끈한 몸매의 외국인인 듯 보이는 그녀.  


' 도대체 내게 무엇을 증명하란 말이지?'


그 순간 2층 입구에서 마셨던 술 기운이 온 몸을 감싸듯 나른 해지며 몽환적으로 느껴지는가 싶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처럼 필름이 끊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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