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과 시혜가 아닌 공감과 연대를 위한...
아파트 입구에 붙어있는 게시판을 살펴볼 일이 많지는 않다. 보통은 중국집이나 피자, 치킨, 족발집 등의 광고 전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전단지가 마구잡이로 붙어 있는 이유는 외부인에 대한 출입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열려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오래전 우리 마을 모든 집 대분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난 임대아파트가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아파트 입구를 무심코 지나치다가 A4지에 말끔하게 인쇄된 공고문을 봤다. 알록달록 광고 전단지속에서 날 좀 제발 봐달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공고문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경비노동자 50% 감축에 대한 입주민 찬반투표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2017년 최저임금이 6,470원이었고 2018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무려 16.4%가 인상된 상황이었다.
서울 강남의 부자 아파트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휴거(휴먼시아 거지)인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돕고 연대하고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라고 여겼던 것일까? 입주민의 아파트 경비, 미화 노동자들에 대한 갑질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까지 올라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을 했다. 머릿속에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공고문을 경비노동자들이 직접 붙였다면?' 이렇게 잔인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혐오스러웠고 끔찍했다. 그 끔찍함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는 괴물이지 않을까 싶었다. 짝꿍과 머리를 맞댔다. 무조건 아무것이라도 해야 했다. 편지를 썼고 짝꿍과 함께 수십 번을 읽고 또 다듬었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서 1천여 장을 복사했다. 퇴근과 동시에 10개 동을 돌며 우편함에 그 편지를 모두 꽂았다. 투표까지는 불과 열흘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매일 퇴근하면서 우편함을 살펴봤다. 편지가 그대로 꽂혀 있기도 했고, 바닥에 나뒹굴어져 있기도 했고, 반송함에 꽂혀 있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편지들이 모두 깨끗하게 치워져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파트 감축에 반대한다는 그래서 경비노동자 감축에 반대투표하자는 쪽지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 날 하루는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 행복한 설렘으로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포스트잇이 몇 장 더 붙여졌다.
편지 한 장 때문이 아니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불현듯 닥터 김사부의 대사가 생각난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모른 척할수록 그런 비극은 계속될 거야. 옳다는 확신이 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사람은 빛이 난다’ 깨알 같은 셀프 자랑이다.
이런 따뜻하고 사람 냄새가 진동하는 아파트에서 평생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사를 하는 날 우리 동 미화를 담당했던 할머니께서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렁그렁 시뻘겋게 눈시울을 붉히며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딸내미에게 쥐어줬다. 그때 편지 쓴 사람이 우리였다는 걸 다 알고 있다고, 고맙다고, 요 녀석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하냐고, 종종 놀러 오라고... 나와 내 짝꿍과 딸내미의 손을 꼭 잡고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딸내미는 청소하시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어린이집에 가다가도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할머니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명절이면 딸내미에게 선물을 쥐어주고 경비 할아버지와 청소 할머니에게 갖다 주라고 했던 터였다. 멀리 이사를 가지는 않았다. 가끔씩 그 아파트를 지나갈 때쯤이면 할머니와 경비 노동자들을 생각한다. 그 이후에도 최저임금이 계속 올랐는데 그때마다 찬반투표를 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할머니는 건강하게 잘 계시는지...
내 딸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프다는 이유로,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멸시받는 세상이 아니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란다. 시간 내서 딸내미와 함께 할머니 뵈러 가야겠다.
<표지 커버 출처 : 다음 순돌이 아빠 블로그>
<덧> 위 내용은 당시 한겨레 신문에 기사화되었다.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158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