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상회를 끝까지 지키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혼자 남겨졌다. 국제상회를 빼곡하게 채우던 과일과 물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모두 사라졌다.
텅 빈 가게와 그 안에 자리한 살림집에 할머니만 남았다. 먼저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할머니는 원망으로 표현했다. 까탈스럽고 예민한 성격의 할머니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준 사람은 오직 할아버지뿐이었으니 남편의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할머니의 성격은 대단했다. 한 번 토라지면 머리를 싸매고 이삼일은 방에 드러누운 채 밥도 먹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에게 죽을 끓여 나르고, 먹든 안 먹든 끼니때마다 밥상을 들이민 건 할아버지뿐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사무치는 날이면 할머니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 벌게진 눈으로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썅노무 인간...'
그렇다. 우리 할머니는 욕쟁이였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할머니 댁에서 보낸 나는 매일 할머니의 욕을 들으며 자랐다.
평소에는 "윤희야~"(할머니는 나를 윤희라고 불렀다.)라고 다정히 부르다가 조금이라도 심기가 뒤틀리면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너 이년, 저 년 봐라~"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할머니가 얼마나 나를 아끼는지, 애기 때부터 나를 업어서 키운 것은 '엄마'가 아니고 '할머니'이니 엄마보다 자신에게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욕이었다.
"어~우 알겠어 알겠어! 내가 나중에 크면 할머니 용돈 많이 줄게!"
내가 능청을 떨면 할머니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웃으며말했다.
"에이~ 육셜년"
할머니의 욕을 들어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말의 형태는 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할머니네 집에서 할머니의 구수한 욕을 들으며 나는 조금씩 자라났다. 그러다 어느 날 육시럴년의 사전적 뜻을 알고 할머니에게 반기를 든 적이있다.
"할머니 육시럴년이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거야?"
"뭔디 ?"
"사람을 여섯 토막내서..."
"아이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민망해하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다시는 육자로 시작하는 욕을 입에 담지 않았다.
뜻을 알고 썼든 모르고 썼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욕은 할머니에게 뜻과는 상관없이 입에 달라붙은 추임새 같은 것이었으니까. 뜻과 상관없이 입에 배어버린 욕.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나서부터 할머니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할머니의 이름은 ‘안언년'이었다.
언젠가 내가 할머니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할머니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 날 서랍장 안에 들어있던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곱상하게 화장을 한 할머니가 웃고 있는 사진 밑에 '안언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대체 할머니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름을 지으셨을까. 뽀얀 피부에 늘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어 시골사람 같지 않았던 할머니에게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안언년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국제상회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대전에 있는 대학의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할머니는 혼자가 되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가끔 마실 오는 동네 할머니들이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었다.
할머니의 외로움을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젊음과 객지생활을 즐기다가 내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다시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조용히 공부할 곳을 찾아 서울 생활을 접고 할머니네 뒷방으로다시 들어갔다.
어렸을 적에는 언니와 함께 지냈던 뒷방이, 이제는 내가 언니가 되어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뒷방에 둥지를 틀었다. 뒷방에 있던 언니의 가구들은 대부분 사라지고할머니의 그릇장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고 3이었던 동생과 수험생이었던 나는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할머니네 집에 가서 잠을 자곤했다.
내가 돌아온 것을 반기면서도 집에서 생활하는 식구가 늘자 할머니는 생활비를 걱정했다. 기름값이 비싸다, 샴푸를 좀 아껴 쓰라며 잔소리를 해 놓고 슬쩍 뒷방에 와서 보일러 온도를 높여주었다. 원체 잔소리가 많은 할머니를 이해하면서도 수험생인 내 삶이 팍팍했던 시절이라 그때는 서운한 마음이 컸다.
뒷방이 추우면 자기 옆에 와서 자라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할머니와 따로 자는 것이 편했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의 곁이 그렇게 좋았었는데..
그러다 점점 할머니 집에 가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친정에 가도 친구를 만나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바빠 할머니를 뵈러 가는 일은 뒷전이 되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그렇게 소홀하면 안 된다!‘며 속상한 마음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하는 할머니에게 서운해져 점점 더 발길이 뜸하게 됐다.
어느 날은 할머니 집 화장실에서 빈 샴푸통이 여러 개 놓여있는 것을 보고 할머니에게 왜 버리지 않고 갖고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목이 멘 소리로 말했다.
"네가 뒷방에서 동생과 공부하며 지낼 때 사용하던 샴푸다. 그때 나와 함께 지낸 추억의 물건이라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었다."라고.. 샴푸통이 뭐라고...
그때는 기름값이며 샴푸값이며 그렇게 잔소리를 하더니.. 우리 할머니의 표현방법을 나는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간 컴컴한 집에서 혼자 지냈던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때 뒷방으로 다시 돌아온 나와 동생이 얼마나 반갑고 의지가 되었기에샴푸통을 추억이라고 생각했을까.
끝내 나는 나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에게 효도를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할머니는 20여 년을 혼자 살며 텅 빈 국제상회를 지켰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세상을 모두 떠났지만 시장 안의 국제상회는 아직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