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희 Aug 19. 2023

질책말고 당근을 받은 날

오래전 당근마켓에 방통대 교재를 팔려고 내놓았었다. 방통대는 교재 없이 동영상 강의만 들어도 공부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시스템이라 내놓은 책들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 책을 사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올려놓은 여러 권 중에 한 권이라도 팔아치우는 게 어딘가.

교재와 워크북까지 3,500원에 팔기로 했다. 거래 상대방이 우리 집 앞으로 와 책을 가져가기로 했고 나는 책 가격에 적당히 어울리는 조금은 허름한 종이백에 책을 넣어 두었다.


내가 책을 챙기는 동안 가족들은 티브이를 보거나 각자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몇 번의 문고리 거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현관문 앞에 물건을 내놓으면 가족들은 내가 당근마켓 거래를 하려나 보다라고 생각할 줄알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러두었다.

"나 이거 당근 거래할 책이야."

노란 갱지로 만들어진 종이백은 열고 닫을 때 요란한 소리가 났고, 바스락 소리에 내 목소리도 묻혀 버렸다.


출근을 하면서 현관 옆에 종이백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사진을 찍어 상대방에게 보냈다. 이로써 나는 판매자의임무를 끝낸 것이었다. 거래할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고, 거래 가능한 상태로 물건을 준비했으며, 거래대금도 입금받았으니 말이다. 이제 구매자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다녀갈 것이다.


그렇게 거래될 줄 알았다. 그날 점심을 먹는데 구매자에게 연락이 왔다.

’ 지금 집 앞에 왔는데 책이 없네요 ‘

구매자 아니 구매예정자가 보내온 사진 속에 우리 집 현관 앞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이럴 수가.


그때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 우리 집 인간 청소기인 남편 밖에 없었다. 깔끔하고 부지런한 성정인 그는 쓰레기가 조금이라도 쌓이기 전에 내다 버린다. 내가 현관 앞에 내놓은 쓰레기를 들고 분리수거장에 들르는 것이 출근 전 그의 루틴이다.


혹시는 역시나였다.

그날도 그는 자신의 루틴에 충실했다.

‘혹시 버렸어?!‘

‘응! 버리려고 내놓은 건 줄 알고 버렸지’

너무나 명쾌한 대답. 뒷 목을 잡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빨리 일을 수습해야 한다. 기다리고 있을 구매자에게 일단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책은.. 책은 어떡하지??

종이가방 채 버렸으면 책이 온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분리수거장에서 다시 회수해서 갖다 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내가 구매자라면 그런 책을 사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혹시 버리셨나요!?’

‘네… 죄송합니다. 남편이 모르고 버렸다네요. 속상하네요. ‘ 라고 했더니 상대방은 자기도 속상하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너무 염려 마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올려놓은 책 중에 필요하신 책 있으면 드릴게요’


상대방은 괜찮다며 내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세상에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니. 내가 만약 구매자의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이해해 줄 수 있었을까.

아마 내 아까운 시간을 빼앗고 헛걸음을 시킨 상대방에게 씩씩대며 기분 나쁜 내색을 했을 것 같다.


혹여라도 교통비를 이야기하면 드려야겠다고 마음응 먹고 있는데 그냥 책 값만 달라고 하셨다.

미안하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요즘처럼 흉악의 정도를 갱신하는 뉴스가 매일 같이 쏟아지는 세상에 그래도 아직은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당근마켓에서 당근을 팔려고 했던 그 날, 오히려 마음의 당근을 선물 받았다.

작가의 이전글 비건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