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의 세간살이를 이민가방 몇 개에 압축해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짐을 팔고, 또 팔고, 못 판 건 기부도 하고, 현대해운으로 이민 가방을 세 개나 보내고, 올 때는 30” 캐리어 두 개를 압축 백으로 꽉꽉 채워서 왔다. 짐은 그나마 싸기만 하면 되지, 퇴사 처리, 차 중고로 처분, 인터넷+아파트 계약+핸드폰+전기+수도 끊고 각종 보험 정리, 계좌에 있던 돈 한국으로 송금, 혹시 몰라 우편 받을 주소도 친구 집으로 이전한 뒤 귀국 비행기까지 예약해놓고 나니 그냥 불법체류자로 숨어서 미국에 눌러앉아 있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 모든 일을 한 달만에 처리하고 한국에 와 2주간 자가격리를 하고 (미국에서 귀국 정리+한국에서 자가격리를 하는 동안 새 회사에서 일도 하고 있었음) 첫 출근을 앞둔 그날! 월요일이 첫 출근이었는데 그 전 주 금요일 주니어 디자이너에게 전화가 왔다. 테헤란로의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 너머로 그 친구는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라며 떨고 있었다. 나는 꼴에 선배라고 “괜찮으니까 차분하게 얘기해봐요.” 의연하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어젯밤에 구속되셨대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깊은 한숨. 진짜 저 말은 아무리 복기를 해도 명대사라 질리지가 않는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후려 맞은 듯한 느낌을 뒤로하고 호기심이 많은 나는 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 인가 싶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이야기의 즉슨..
미국 유명 미대를 갓 졸업한 이 주니어 디자이너는 이 회사에 나보다 일주일 먼저 입사해 실제로 대표를 따라다니며 투자자들을 만나기도 하며 재택근무를 했다. 금요일 첫 사무실 출근을 위해 위워크를 갔는데 출입증이 없어 대표에게 전화를 했더니 웬 모르는 남자가 받더니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고 한다. 이 남자는 투자자 중 한 명이고 사무실에는 회사의 개발팀장도 같이 있었는데, 전 날 대표가 구속되고 연락이 두절되자 이 투자자는 대표의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고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대표의 핸드폰을 입수, 그가 꾸민 이 모든 계략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라는 사람은 누구고 왜 갑자기 구속이 되었을까? 그것도 재판도 없이 갑자기 현행범으로 체포가.. 여기서부터는 편하게 이 사기꾼 대표를 J라고 칭하겠다.
사실 J는 사문서 위조, 사기 등 전과로 이미 교도소를 한 번 다녀온 경력이 있었다. (재직했던 회사, 대학 등 전부 거짓말) 전 직원이 나포함 6-7명 된다는 것 또한 거짓말이었고 J 대표, 대표의 지인이자 피해자인 개발팀장, 내 밑의 어린 주니어 디자이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뿐인 거의 유령회사였으며 심지어 J는 전과 11범의 사기꾼이었다. 슬랙에 있던 여러 명의 프로필들.. 모두 가짜였겠지?
J는 우리에게 앱을 만들게 하고 그걸 빌미로 여기저기 투자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거였다.
사실 여기까진 모든 스타트업의 생태인데 이 사람은 회사에 단 1프로도 진심이 아니었던 걸 알 수 있는 게, 내게 데이팅 앱을 개발하자며 가져온 앱 이름이 “텐프로”였다. 내가 해외 생활을 오래 해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되려 “그래.. 설마 대표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앱 이름을 이걸로 하자고 했겠어? 유학생활을 해서 모르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로고를 만들어 갔다. 이게 더 가관인 이유가 바로 다음 대목이다.
그래서 왜 구속이 됐냐고! J는 안마시술소에 갔고 20만 원의 비용이 나왔는데 그걸 지불하지 않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벌금이 50만 원이 나왔다. 근데 자긴 억울하다고 재판을 열어달라고 했단다. 막상 재판에 가보니 전에 사기 친 것들로 감옥에 간 뒤 출소 후 집행유예 기간이어서 바로 구속이 되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
구속은 구속이고 졸지에 실업자가 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임금체불 진정서를 쓰러 노동청에 출석을 하러 갔다. 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은 J와 얽혀있는 투자자들이 모여서 집단소송을 진행할 건데 피해액만 10억 언저리이고, 데이트 사기를 당한 여자의 수도 엄청 많아서 나의 이 소소한 임금체불 피해비용은 지급받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우선순위가 낮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후 약 4개월 동안 진정서도 넣고 법원까지 사건이 올라갔지만 결국 임금은 아무도 돌려받지 못했다. “대표가 회사 운영을 중단하고자 함에 고의성이 없었고, 고로 임금체불에 대표의 책임이 없다”가 이유였다.
J의 조서를 쓰러 서울구치소에 면회를 간 경찰관은 내게 J가 미안하다고 꼭! 전해달라며 출소하자마자 월급도 정산해주겠다고 했다는데.. 연락은커녕 돈도 못 받았다.
혹시 그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Jason, 전 돈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부디 제가 이 일을 제보한 실화 탐사대와 궁금한 이야기Y 작가들과 인터뷰 한 번만 해주세요. 저도 티비에서 모자이크 인터뷰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