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지인들에게 '나는 개잡부 하바리니까..'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처음 귀국할 때에 꽃밭이던 내 마인드는 어느새 뻘밭이 되어있었다. 이것저것을 다하다 보니 내가 뭐하는 디자이너인지 정체성이 흐려지게 됐고, 덕분에 이때부터 내 커리어는 본격적으로 망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하도 잡일을 많이 하는 바람에 웬만한 기업 쪽으로는 보여줄 수도 없을 포트폴리오가 생겼고 직원 한 명으로 500가지의 업무를 신나게 뽑아먹는 스타트업들이나 환영할 법한 디자이너가 되어있었다. 이제 내가 웹디자이너인지, 브랜딩 디자이넌지, 포토그래펀지, 공간 디자이넌지, 인쇄소 직원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올 무렵 (킨코스 직원들을 가족보다 자주 봄) 납득하기 어려운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 술을 바리바리 사서 우리 집으로 모이게 된 퇴사 TF 멤버들.. 이 상황에 대해 긴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회사 자본도 이미 앵꼬가 났고 직원들도 인격적인 대우를 못 받고 있으니 다 같이 나가자"였다. 난 돈보다는 커리어를, 커리어보다는 사람을 좇아 일을 하는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컥했다.
가뜩이나 열명 남짓한 회사의 구성원 절반이 대표의 직계 가족이라는 사실+미친 업무량으로 지쳐가고 있던 나는 단체 탈주 열차에 탑승하는 게 내 유일한 출구라는 걸 느끼고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당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제일 늦게 나오긴 했지만.. 조용히 진행하던 업무를 마무리 짓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며 퇴사 날짜를 기다렸다. 친하게 지내던 마케터 한 명과 퇴사 면담을 하러 간 날, 대표는 끝까지 스톡옵션과 연봉 인상을 얘기하며 발목을 잡았지만 이미 같이 일 할 사람들이 모두 나가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있고 싶지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냥 정이 떨어져 버려서 하루빨리 손절을 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면 이해가 될까?
물론 단기간에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며 배운 것도 많고 소중한 인연들도 얻은 건 사실이지만 두 번은 절대 못할 짓인 걸 세게 깨달았다. 그 후로 스타트업은 믿고 거르려고 했지만.. 결국 면접 뺑뺑이의 끝은 또 다른 스타트업이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가는 건 쉬워도 스타트업에서 대기업 가긴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 케파가 딸려서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는 내 커리어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끝을 모르고 하락장을 타는 삼전 주식 마냥 내 커리어도 끝없이 망테크를 타는 중인데 난 이 망테크 커리어에 단단히 물린 개미가 되어버렸다. 대기업 주식은 장투 하면 가능성이라도 있지 내 커리어는 아무리 존버를 해도 회생불가일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송파에 키자니아라는 곳이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직업체험 테마파크인데, 내가 어릴 때 저런 게 있었어도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알고 보니 내 적성은 소방공무원인데 여기서 스케치랑 포토샵이나 뚝딱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고.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들어와서 갑자기 한 달만에 시니어를 달더니 얼마 후엔 PM을 자청하고 지금은 그냥 제멋대로 신사업개발을 열심히 하고 있는 회사의 누구를 보고 있자니 현타도 온다. 내가 백날 상품 썸네일 몇만 개를 만들어봤자 입 한번 잘 터느니만 못한 걸까? 포토샵을 배울게 아니라 웅변 학원을 다녔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