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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Jun 21. 2022

06. 개잡부 디자이너의 시작


당시 나는 지인들에게 '나는 개잡부 하바리니까..'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처음 귀국할 때에 꽃밭이던 내 마인드는 어느새 뻘밭이 되어있었다. 이것저것을 다하다 보니 내가 뭐하는 디자이너인지 정체성이 흐려지게 됐고, 덕분에 이때부터 내 커리어는 본격적으로 망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하도 잡일을 많이 하는 바람에 웬만한 기업 쪽으로는 보여줄 수도 없을 포트폴리오가 생겼고 직원 한 명으로 500가지의 업무를 신나게 뽑아먹는 스타트업들이나 환영할 법한 디자이너가 되어있었다. 이제 내가 웹디자이너인지, 브랜딩 디자이넌지, 포토그래펀지, 공간 디자이넌지, 인쇄소 직원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올 무렵 (킨코스 직원들을 가족보다 자주 봄) 납득하기 어려운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 술을 바리바리 사서 우리 집으로 모이게 된 퇴사 TF 멤버들.. 이 상황에 대해 긴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회사 자본도 이미 앵꼬가 났고 직원들도 인격적인 대우를 못 받고 있으니 다 같이 나가자"였다. 난 돈보다는 커리어를, 커리어보다는 사람을 좇아 일을 하는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컥했다.


이렇게 된 이상 퇴사로 간다


가뜩이나 열명 남짓한 회사의 구성원 절반이 대표의 직계 가족이라는 사실+미친 업무량으로 지쳐가고 있던 나는 단체 탈주 열차에 탑승하는 게 내 유일한 출구라는 걸 느끼고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당시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제일 늦게 나오긴 했지만.. 조용히 진행하던 업무를 마무리 짓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며 퇴사 날짜를 기다렸다. 친하게 지내던 마케터 한 명과 퇴사 면담을 하러 간 날, 대표는 끝까지 스톡옵션과 연봉 인상을 얘기하며 발목을 잡았지만 이미 같이 일 할 사람들이 모두 나가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있고 싶지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냥 정이 떨어져 버려서 하루빨리 손절을 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면 이해가 될까?


물론 단기간에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며 배운 것도 많고 소중한 인연들도 얻은  사실이지만  번은 절대 못할 짓인  세게 깨달았다.  후로 스타트업은 믿고 거르려고 했지만.. 결국 면접 뺑뺑이의 끝은 또 다른 스타트업이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가는 건 쉬워도 스타트업에서 대기업 가긴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케파가 딸려서인지는 모르겠다.


고민이 많아진 요즘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는 내 커리어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끝을 모르고 하락장을 타는 삼전 주식 마냥 내 커리어도 끝없이 망테크를 타는 중인데 난 이 망테크 커리어에 단단히 물린 개미가 되어버렸다. 대기업 주식은 장투 하면 가능성이라도 있지 내 커리어는 아무리 존버를 해도 회생불가일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송파에 키자니아라는 곳이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직업체험 테마파크인데, 내가 어릴 때 저런 게 있었어도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알고 보니 내 적성은 소방공무원인데 여기서 스케치랑 포토샵이나 뚝딱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고. 프로덕트 디자이너라고 들어와서 갑자기 한 달만에 시니어를 달더니 얼마 후엔 PM을 자청하고 지금은 그냥 제멋대로 신사업개발을 열심히 하고 있는 회사의 누구를 보고 있자니 현타도 온다. 내가 백날 상품 썸네일 몇만 개를 만들어봤자 입 한번 잘 터느니만 못한 걸까? 포토샵을 배울게 아니라 웅변 학원을 다녔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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