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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현 Apr 17. 2020

오늘의 표현:'Less is More' 적을수록 많다

<어색한 침묵이 견디기 힘든 너에게>

 



직업은 강사인데 평소에 말 수가 많지 않습니다.

교육방송과 강연에서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지만

삶의 자리로 돌아오면

말을 함으로써 빠져버린 에너지를 충족시키려

주로 침묵을 택하는 편입니다.

인간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매력을 쏟아부어 상대를 함몰시키기보다는

조금씩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러다 보니 쌍방의 대화에서도 탁구공을 주고받는 식의 대화보다 적절한 여백이 있는

대화를 추구합니다.
            


애매한 타이밍의 행간의 여백과

종종 침묵으로 보이는 경청 때문에

상대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다 보니 잠시 정적이 흐르는 것뿐인데

상대는 유독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경험하지 못한

어색한 기류에 휩싸였다고 생각하지요.



며칠 전 저와 대화를 나누던 친구는

일시적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무슨 일 있어?’,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라며

잠시의 공백을 기어이 메우려 했습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친구는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명감을 가지고 저로 하여금 기어이 말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장 이 침묵이 너무 불편하니 

네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해줬으면 해’라는

친구의 속마음이 읽혔습니다.

미처 대꾸할 말이 준비되지 않은 제겐

영락없는 대화 구걸이었습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쥐어짜 낸 저의 한 마디는

 오히려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피곤한 만남을 뒤로하고

잠들기 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여러 번 뒤척여가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 어린아이 같은 친구의 처세가 탐탁지 않아

언짢은 마음으로 잠을 청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친구를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무참히 역관광을 당했더랬습니다.

(*역 관광: 신세대 용어로써 역지사지의 입장을

직접 당해본다는 의미)

  


웬 일로 신이 나서 평소의 저 답지 않게

이런저런 말로 수다쟁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날따라 얘깃거리, 대화 별 주제가

어찌 그리 많은 지 다시 생각해봐도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듯 멈추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상 밖으로 이번엔 그 친구가 별 반응 없이

뜨문뜨문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시의 침묵으로 대화의 공백을 자처했습니다.



다행히도 유치한 복수극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단지 그날만은 저와 같은 에너지 기류가 아닐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어? 쟤가 왜 말이 없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오만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노심초사했습니다.


친구가 다소 무례해 보였습니다.

온전히 저와 보내는 현재 이 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아 불쾌했습니다.

가만히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이 상황은

몇 주전 제가 ‘과묵한 역’을 맡았던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친구는 침묵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주는

무언의 불편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대답이라도 간절히 원했던 친구의 심정이 백 번 이해가 갔습니다.


자신의 에너지와 같은 수준에서 교감하며

기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반려동물들이 주인에게나 보일 법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의 상징입니다.

친구는 단순히 수다 욕구를 해결할 대화 상대의

차원으로 저를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 자체를 나누고 그 속에 함께

손을 잡고 녹아들어 가고 싶었던

친구의 본심을 그제야 헤아렸습니다.


——

  

그러고 보니 대화 중 잠시의 침묵 자체를

굳이 부정적인 신호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이토록 잠깐의 침묵을 두려워하는 것은 ‘혹시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걸까’라는

약간은 순진한 오지랖과 상대를 기쁘게 해 주고 픈 마음, 즉 과도한 이타심에서 비롯된 불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불안을 해결하고자

자신의 진심을 증명받으려 애쓰는 것이지요

.

  

제가 왜 그렇게 친구의 본심을 몰라주고

 ‘투 머치 토커’ (말이 너무 많은 사람)로

낙인찍었는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저는 늘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은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지만

제 마음 한켠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을 아끼고

경청을 남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폭포수 같이 자기 말만 뿜어 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나 있습니다.

내용의 대부분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과

가난한 자기 증명의 구걸입니다.


저는 평소에 내뱉기 식의 소통보다는

안으로 수렴하고 사색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필요 이상의 말들은 알아서 걸러지면 좋을 텐데

괜히 머리를 혼잡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날따라 유난히 말이 많았던,

그리고 반복적으로 대답을 요구했던 친구가

본의 아니게 피곤 유발자 ‘Too Much Talker’의

누명을 쓴 것이지요.


조금 세게 말해도 되나요?

침묵의 권리를 빼앗는 갑질 횡포자,

무법자로 보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저도 똑바로 못하는 주제에

어디 누굴 가르치려 드는지 글을 쓰면서도 우습네요.

  haha;;



앞으로는

쌍방의 대화 속에 갑작스러운 여백이

그리 당황스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상대의 ‘수다 욕구 스위치’가 켜 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잠시 입을 닫고 숨만 쉬고 있는 것도

더 깊고 넓은 소통을 위한 준비 운동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은

사공들의 인원수보다

말 수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현장의 참상입니다.


상대가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주는 것도

굉장한 매너입니다.

상대의 감정과 에너지의 높낮이가

자신의 페이스와 늘 같기를 강요하는 것은 

어린아이 떼쓰는 식의 응석받이가 되는 격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혹 현란한 말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까

걱정되나요?

걱정 붙들어 메셔도 됩니다.

상대를 평생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빽빽이 차 있는 나의 화술이

아닌 나의 행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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