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 2(2042년)
“아빠~~아까부터 뭘 그리 혼자 고민해?”
수정이가 라면사리를 덜어주면서 나를 부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라면사리를 받았다.
“아빠, 난 누굴 닮았는지...라면사리가 넘 좋아...
아빠도 그래?”
“하하하...수정이 너도? 그럼 당연히 아빠를 닮은거지...
감자탕에 라면 사리는 진리잖아...
넘 맛있다”
“그치...내 별명이 뭔지 알아?
<라오>! 라면사리5개는 기본이라는 말이지. 크크”
“맞아요, 수정이 라면 사랑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요...부대찌개에 라면사리 5개는 기본이죠.
부대찌개를 먹는건지 라면사리를 먹는건지 가끔 헛갈릴 때가 있어요.”
“5개 그건 좀 오바 같은데...하하”
“사실은 이게 다 아빠가 이혼을 해서 생긴 거야...
어릴 때 부터 할머니는 집에서 라면 먹는 걸 싫어하니까 눈치 보이고,
가끔 외갓집에서 가서 라면을 먹자고 하면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왠 라면이냐고...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하니까 또 라면을 못 먹고...내가 정말 라면을 맘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니까...”
“그래서 이렇게 라면사리 5개를 먹게 된거라고? 너무 비약이 심한거 같은데...
그냥 라면을 좋아한다고 하는 게 맞지...”
“나중에 아빠가 라면 광고 찍게 되면 일반인 모델 필요할때 수정이를 꼭 써야 겠다.
광고주도 좋아하겠는데...”
“정말? 꼭 써줘...내가 다른 건 몰라도 라면은 정말 맛있게 먹을 자신있어.”
피는 못 속인단 말이 맞는 거 같다.
우리 수정이도 나 만큼 라면을 좋아하고 있다니...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나의 이혼때문이라니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이의 식성까지...정말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들이 이혼으로부터 시작된다니 아빠로서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민기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 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수정이와 나는 잠시 얼굴만 쳐다 보다가 어색함을 느끼고 나는 소주를 하나 더 주문했다.
“아빠, 오늘 따라 좀 느낌이 다른데... 무슨 고민있어?”
“고민이 있지...”
“뭔데? 얘기해봐~”
“그게 말이지...아빠가 이혼을 잘 한건지? 아님 이혼 때문에 수정이나 호정이가 아빠한테 말 못하는 속상한 일은 없는지...그리고 아까 수정이가 아빠가 밉다고 했잖아...뭐 그런 것들이 다 고민이지 뭐”
“그래서 지금 20년이 지나서 이혼을 후회한다고? 아님 다시 돌아가자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아빠가 모르는 게 있다면 알아야지...
그래야 너희들한테 사과할 일은 사과를 하고, 너희가 혹시 오해 하는 부분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휴~~~아빠 참 뻔뻔하지?”
수정이는 소주를 벌컥 들이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자작을 하면서 두 번째 잔도 벌컥 마셨다.
세 번째 잔을 채우려는 순간 민기가 자리에 앉으며 소주병을 낚아 챘다.
“야~ 너 왜 혼자서 자작을 해? 아버님 앞에서?”
“시끄러...넌 좀 모르면 조용히 있어줄래...술도 못 마시면서”
“내가 왜 술을 못 마셔? 안 마셔서 그렇지...자 봐봐”
민기는 자기 술잔을 들고 완샷을 했다.
“아빠...난 그냥 엄마가 보고 싶었어...
그 어린 나이에 남들은 다 엄마,아빠가 있는데 나는 엄마가 없었잖아...
난 그게 늘 부러웠어....애들은 엄마한테 잔소리 듣는 다고 나를 오히려 엄마가 없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는데...사실 난 그런 잔소리라도 듣는 엄마 있는 애들이 부러웠어”
“그랬구나...어린 수정이가 힘들었겠네...”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행복한 가정을 바래지도 않았어, 그냥 남들과 똑같이 엄마,아빠 있는 그런 평범한 아니 당연한 가정이 늘 부러웠어”
“수정아, 그건 니가 어려서 그런거 아냐? 나는 반대야.
나는 엄마,아빠가 매일 싸웠어...뭣 때문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아빠는 맨날 술 먹고 늦게 오시고 그런 아빠와 엄마는 나와 내동생 앞에서 소리 소리를 지르며 싸웠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어.지긋지긋하게...그때 난 기도했어. 차라리 부모님이 이혼하게 될라고”
“뭐래? 그래서 너희 부모님은 이혼 하셨어? 안 했잖아~~
어쨌든 너는 싫든 좋든 한 집에서 엄마,아빠 다 같이 살았잖아...”
“같이 살면 뭐 해? 행복하지 않은데...얼마나 하루하루가 고통이고 같이 사는 게 싫었는데...
나는 가끔 너를 보면 부러울때가 있어...너는 그런 부모님 싸움은 안 보고 살아왔을테니까...
가끔 니가 나에게 왜 집에 안 들어가냐고 물었지? 아직도 집에 가면 부모님이 싸우시니까...
진짜 너무 싫어...”
수정이는 한 부모 아래서 사는 게 싫었고, 민기는 양부모 아래서 사는게 싫었다.
누구의 고통이 더 큰 것인지, 누가 더 불행한 건지...
두 아이는 지금 내 앞에서 그 잘난 부모들 욕을 서슴없이 내 뱉고 있다.
부끄럽다. 미안하다. 그리고 나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다.
이 아이들의 부모로써 한편으로는 어른으로써 너무 무책임한 나를 돌이켜 보게 된다.
나는 슬며시 자리를 피해 나와 먼저 계산을 하고 밖에서 밤하늘만 쳐다 보았다.
내가 이혼을 안 했더라면 수정이는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잘 자란 아이로 성장했을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어땠을까?
그 날의 일을 잊고 아내와 잘 살 수 있었을까?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 받지 않은 듯, 아내를 사랑하며 잘 살 수 있었을까?
아니 우리 부부의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참았어야 했을까?
동생 민지와 우리 부모님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된다
그때 수정이와 민기가 밖으로 나왔다.
“아빠,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떡해? 사람 무안하게...이럴려고 오늘 만나는 거 아니였는데...
혹시 아빠 내말에 상처 받은 거 아니지?”
“상처는 무슨...당연한 말을 들을 건데 뭐...오히려 아빠가 많이 미안해...진심으로”
“아버님, 괜히 제가 흥분해서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거 아시죠?
기분 푸세요~”
“아니야...그런거 전혀 없어...분위기도 그런데 우리 2차 가자~”
“2차는 무슨...아빠 간단하게 우리 편맥이나 하고 들어가자”
“편맥?”
“편의점에서 맥주 4개 만원하니까 그거 사서 간단하게 입가심하고 가자는 말이지...”
“아...그 편맥...좋아”
“아버님 편맥은 제가 쏩니다~”
수정이는 보면 볼수록 나를 참 많이 닮았다.
술을 좋아하는 것도 분위기를 잘 파악하는 것도...
어느덧 그 어린 딸과 술 한잔을 마시며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나를 보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20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동안 아빠로써 두 어린 딸들에게 어떤 아빠였을까?
너무도 궁금하다. 좋은 아빠는 분명 아니었을거다. 일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같이 못 했을게 뻔하니까...
“아버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게 뭐하긴 한데요...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뵈니까 수정이가 부러워요.
저는 솔직히 아직도 저의 아버지와 한번도 밖에서 이렇게 술 한잔 못 했거든요. 아니 안 한거죠.
제가 싫으니까...”
“요즘 다 그렇지...누가 부모와 술 먹고 싶겠어?”
“수정이는 안 그렇잖아요? 가끔 수정이 말 들으면 아버님과 영화도 같이 보고 밥도 같이 먹고 술도 한잔 한다는데 믿어 지질 않았거든요...
제가 그렇게 안 해봐서...근데 오늘 이렇게 아버님 뵈니까 좋아요. 분위기도 딱딱하지 않고 진짜 편해요...”
“그래? 다행이네...나야 뭐 내가 평상시에 수정이에게 잘 못하니까...
가끔 시간되면 이렇게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하는 게 좋아서 그런거 같아...
오히려 나랑 영화보고 술 한잔 같이 해주는 수정이가 더 고맙지 뭐...”
“그치?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딸 없다니까...아빠는 정말 나한테 잘 해야돼, 알았지? 하하하”
“그래 수정아, 앞으로 더 잘 할게...”
수정이가 정말 이제는 어른이 다 된 것 같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이 있었을 게 분명한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못난 이 아빠를 위로 해준다.
<13부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