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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Nov 04. 2019

퍼스트 리폼드 해석

신정론(Theodicy)을 영화화하다.

《퍼스트 리폼드 (First Reformed, 2017)》 해석_신정론(Theodicy)을 영화화하다.  

https://youtu.be/NkiRR3T_3NY

 

<퍼스트 리폼드>의 형식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를 미국 개척 교회를 배경으로 고쳐 쓴 것이나 다름없다. 주인공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사람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반면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안내해주는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지켜야 할 것 같은 존재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나타난다. 이때 그가 무너져버린 지구, 즉 환경파괴를 자행하며 이룩한 도시 문명을 바라볼 때 영화는 일상의 묘사 차원을 넘어 전혀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린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한 남자의 불안      

툴러 목사는 집안의 애국적 전통에 따라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종군시키지만, 불과 6개월 만에 전사한다. 이로 인해 이혼당하고, 소변조차 편히 보지 못하는 그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조금씩 쇠약해져 간다.

      

폴 슈레이더 감독은 “<콜드 워>의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의 전작 <이다>에서 영감을 얻었다. 관객들이 인간과 영화 속 인물에 더 집중해 주길 바란다.”며 4:3의 화면비율로 찍었다고 인터뷰했다. <퍼스트 리폼드>에서 카메라는 절대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는다. 약간 오즈 야스지로가 연상되는 고정된 카메라에 인물들을 가둔 것은 톨러 목사의 처지를 대변해준다. 그의 방안이 텅 빈 까닭도 그의 내면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또, 지구가 환경오염에 처해있듯이 톨러 자신도 암에 걸렸다. 기독교의 “자연 정복 신학”에서 환경오염을 심화시켰다고 이론을 통해 종교와 세계 그리고 내면을 병치시킨다.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인간이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기독교의 창조 교리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기독교는 창세기적 생태론에 근거해서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서 간주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뉴욕주 올버니에 위치한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한때 개혁 교회였지만 지금은 신도들이 잘 찾지 않는 지역 관광지가 됐다. 이는 청교도들이 건국한 나라에서 나날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이 늘어난다는 최근 통계와 절묘하게 부합된다. 슈레이더 감독도 칼뱅주의자이고, 청교도나 우리나라 주류인 장로회 모두 장 칼뱅의 영향을 받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과연 툴러 목사와 퍼스트 리폼드 교회를 어떤 연관을 지닐까? 250주년 기념 재봉헌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오르간 역시 고장 난 상태다. 10명 남짓 되는 신도들이 찾아오지만, 풍요로운 삶 교회가 후원하지 않으면 당장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 툴러의 고장 난 신장처럼 교회의 화장실도 망가졌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교회의 오르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도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제 툴러 자신의 실패처럼 읽힌다.     


감독은 주인공과 공간을 대칭되도록 놓고서 현실에서 대안이 될 수 없는 ‘신앙의 종말’을 고한다.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툴러와 마이클이 대화를 나눈 다음날 툴러 목사가 인터넷으로 환경문제를 검색하고,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을 읊는 대목은 복선이다. 2장에서는 마이클이란 인물부터 살펴보자!     

  

    


2. 신앙의 종말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남편, 마이클은 인간에 의해 초래된 기후변화로 (주님의) 세상이 망가졌다고 단언한다. 그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아이들이 온전히 자랄 수 없을 것이라며, 차라리 낙태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그는 ‘푸른 행성 연대’에서 환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수감됐다. 열성적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라는 메리의 말처럼 마이클은 신앙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행위(자살)를 저지른다. 이는 암담한 현실에서 개신교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신앙의 종말’을 의미한다.   


툴러 목사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 목숨을 끊은 마이클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유언장에 적힌 대로 오염된 땅에서 장례식을 집도한다. 이때 교회를 후원해주던 자본가가 등장한다. 그는 닐 영의 ‘Whose Gonna Stand Up? (And Save The Earth)’을 노래해줬다고 툴러 목사를 힐난한다. 거대 자본 앞에서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무력해진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조용히 풍요로운 삶 교회에 새겨진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을 비춘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에서 주어로 ‘자본’을 넣으면 굉장히 의미심장해진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물질적인 하부 구조가 정신적인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라는 명제와 결부된다.


툴러 목사와 제퍼스(세드릭 디 엔터테이너) 목사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논쟁을 벌인다. 심지어 토마스 머튼까지 언급된다. 성서로 자본을 옹호하기도 반대로 비판하는 근거로도 쓰이는 대목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이 논쟁은 흡사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와 대단히 유사하다. 베버는 이윤추구(목적 합리적 행위)를 하는 목적은 신의 구원(가치 합리적 행위)을 확인하고자 자본주의 발전을 기여했던 것인데,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목적 합리적 행위(이윤추구)만 내세울 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등의 삶의 목적들이 정작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3. 초월적 존재, ‘메리’     

결국, 이 논쟁에서 절망감을 느낀 툴러 목사는 교회로 돌아와 마이클의 ‘자살 폭탄 조끼’를 대신 입고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오염시킨 자본가와 타락한 사제를 몸소 응징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창문으로 교회를 바라보던 중에 메리를 발견한 툴러는 폭탄조끼를 얼른 벗어던진다. 이런 툴러의 실패는 마이클의 자살이 반복되었음을 뜻한다. 신앙의 종말을 또다시 경험했지만, 툴러 목사는 성직자답게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다.    

  

마침내 툴러는 극 중 등장했던 찬송가 <보혈에 씻김 받았나요?(Are You Washed In the Blood?)>처럼 피로 정죄한다는 의식을 행한다. 그는 (예수의 가시관처럼) 철조망을 몸에 두르고, (예수의 성의를 연상시키는) 흰 로브를 걸친다.     

 

잠겨있던 문이 열리며, 메리가 툴러 목사를 ‘Reverend(목사님)’이라고 하지 않고 “Ernst”라고 이름을 부르자 그간 상실의 고통을 잊게 해 주던 위스키 잔을 떨어뜨리고, 그녀를 안고서 뜨거운 입맞춤을 나눈다. 포옹이 깊어질수록 툴러의 몸에 두른 철조망이 죄여 온다. 같은 시각 예배당에서 성가대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가 들려오며 영화는 끝난다.    

  

그러고 보니 메리를 초월적 존재로 그린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 메리가 죽은 남편을 대신해 툴러 목사에게 마음의 평화를 위해 치렀던 의례를 행하면서 의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순례하는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이처럼 메리는 툴러 목사에게 ‘메시아’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고 보니 ‘메리’라는 이름은 서양식 작명이 그러하듯 성경의 ‘마리아’에서 따왔다.      


(결말에 관해) 감독은 죽은 여인이 예수를 자처하던 ‘미친’ 남자에 의해 부활하는 기적으로 맺었던 <오데트(1954)>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오데트>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처럼 슈레이더는 설명을 생략하고, 인과율을 일부러 무시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열린 결말을 안겨준다.         


 

4.  Will God Forgive Us?      

(영화 중반부에서) 툴러가 환경오염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버크사 사장 에드를 만나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신이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라고 다그치는데, 얼마 후 그 말은 다시 교회 앞에 걸려 있는 장면이 반복 사용되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의문점을 풀어야 한다.     


 왜 기독교에서 ‘용서’가 중요할까?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니고 태어났다. 즉, 이 세상에 고통이 가득한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원죄’라 불리는 굴레는 사람이 아무리 말씀대로 믿음과 선행을 실천해도 벗어날 수 없다. 오직 하느님의 용서(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만이 죄인인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신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 교리가 성립될 수 없음을 수많은 신학 논쟁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뒤집어보면, 인간이 무력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이것은 툴러가 아들과 마이클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결론적으로 <퍼스트 리폼드>는 ‘신은 왜 세상의 고통 앞에 침묵하는가?’를 묻는 사회드라마다. 그러므로 사회학적으로 환원하자면, 마르크스처럼 자본(하부구조)에 의해 종교(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입장이나 베버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신의 구원(가치 합리적 행위)은 사라지고, 이윤추구(목적 합리적 행위)만 남았다는 탄식 중에 어느 것을 택해도 슈레이더가 내리는 결론은 같다.      


★★★★☆  (4.5/5.0)      


Good : 청교도 정신(칼뱅주의)으로는 더 이상 미국을 구원할 수 없다. 

Caution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를 연상케 하는 영화적 화법     

     

● 제목의 의미

‘성경에 맞게 개혁된 교리를 수호하자’라는 뜻으로 'reformata' 혹은 'reformed'라는 과거형을 쓰는데, 이는 칼뱅주의에 따라서  더 이상의 외부적인 요소를 개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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