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100 Japanese Movies
유서 깊은 역사와 노하우를 자랑하지만, 제작위원회가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는 횡포에 제작사와 배우, 감독, 스태프는 열정페이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토호가 배급 90% 가까이 독식하는 독점시장이라 과거의 일본의 위대한 영화만큼 걸출한 작품들이 드물어진 상황이다. 한국영화도 빅3(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가 과점하는 시장이고, 수직계열화로 제작부터 배급까지 전부 관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사례를 반면교사할 필요가 있다.
#30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ジョゼと虎と魚たち·2003) 이누도 잇신
현대판 인어공주 이야기, 대학생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는 우연히 언덕길을 내달리는 유모차 속에서 조제(이케와키 지즈루)를 발견한다. 츠네오의 연민과 호기심은 점점 사랑으로 바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제의 현실적인 조건이 츠네오에게 구속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 속 여인의 이름을 딴 조제가 사랑을 경험하며 아이와 어른 사이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과 홀로 대면하게 된다. 일본 밴드 쿠루리의 음악이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조제의 심정을 대변한다.
#29 : 러브레터 (Love Letter·1995) 이와이 슌지
액자구조와 일본의 미의식이 결합한 〈러브레터〉는 눈이 부실 듯한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수성 짙은 이야기로 많은 팬덤을 양산했다. 죽은 옛 연인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와 그녀와 동명이인이자 중학교 동창인 이츠키(나카야마 미호)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실이 드러난다. 즉 과거의 사건(액자 안)이 현재(액자 밖)에 나와서 그 의미가 이해된다. 이를 통해서 액자 밖과 액자 안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두 여성을 중심으로 ‘첫사랑’과 ‘죽음’이 맞닿아 고백과 치유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전달한다.
#28 : 걸어도 걸어도 (歩いても 歩いても·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 영화인에게 ‘오즈 야스지로’라는 우뚝 솟은 거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마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 고통받는 영화인 중에 으뜸일 것이다. 본인은 켄 로치나 마이크 리를 예시로 들며 비교를 피하려고 하지만, 그 유사성은 부인할 수 없다. 오즈는 등장인물끼리 빙 둘러앉아 관객을 이야기로 초대하는 반면에 고레에다는 인물을 카메라로 묵묵히 관찰할 뿐이다.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셴의 테크닉을 연상시키는 초연함이 두드러진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고레에다는 끼어들기를 거부하기에 오즈와 다른 순간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 가정을 엿봄으로써 오즈와 나루세 같은 선배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끼리 이따금씩 불편한 침묵을 지키며, 인내의 가면을 이따금 벗겨지는 묵힌 감정을 기록한다.
#27 :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月はどっちに出ている.1993) 최양일
일본판 〈똑바로 살아라〉, 양석일의 《택시 광조곡》이 원작으로 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강충남(키시타니 고로)과 필리핀 여성 코니(루비 모레노)의 연애를 중심으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일본의 이방인들, 마이너리티들을 긍정한다. 길치인 신입 택시기사가 달이 어디에 떠있냐고 묻는 대사처럼 재일 한국인과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위치를 고찰한다. 웃음 속에 페이소스가 담겨 있어 잔잔하게 마음을 울린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GO〉 (2001), 〈박치기〉(2004), 〈피와 뼈〉(2004) 등 재일 한국인을 다룬 작품들이 제작되는 계기가 된다.
#26 : 동경의 황혼 (Tokyo Twilight·1957) 오즈 야스지로
〈동경의 황혼〉은 오즈가 한 번도 그리지 않았던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류지수), 어머니(야마다 이스즈), 큰딸 다카코(하라 세츠코), 작은딸 아키코(아리마 이네코) 모두 하나씩 결핍되어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 함께 해주길 염원하지만, 그 소망은 이뤄지기 쉽지 않다. (가출한 엄마, 이혼한 큰딸, 혼전 임신한 막내딸 등 오즈 영화의 어떤 여성들보다 파격적인 인물들이 나온다)
오즈의 마지막 흑백 영화는 할리우드 누아르에서 힌트를 얻어 오즈가 구축한 형식미를 파괴한다. 일부러 360° 법칙을 벗어나 캐릭터를 뒤에 앉히고 가족의 봉합을 여운이 남는 그림자 뒤로 물린다. 화목한 가정이라는 감독의 보수적 이상 때문에 여성 캐릭터들은 매서운 한파를 맞게 된다는 역설이 씁쓸하면서도 우울하다.
#25 : 들불 (野火·1959) 이치가와 곤
1945년 패전 말기의 필리핀 레이테 섬에 살아남은 패잔병들의 실상을 비춘다. 기아와 질병, 전쟁의 참혹함에 몰린 상황을 비교적 우익 사관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 공정하게 그리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 패잔병의 생생한 증언 덕분이다. 원작자인 오오카 쇼헤이부터가 그러하다. 원작 소설에 비인간적인 잔혹행위는 전부 그가 태평양 전쟁에서 몸소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식인 광기가 출몰하는 생지옥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밀도 높게 묘사했다. 아쿠타가와 야스시의 스산한 음악이 적막함을 고조시키다가도 찰리 채플린 마냥 슬랩스틱으로 온기를 더하는 재치에서 무장 해제되고 만다
#24 : 퍼펙트 블루 (パーフェクトブルー·1997) 곤 사토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기 때문에, 정체성은 예술에서 중요한 화두가 된다.은퇴한 아이돌이 배우를 꿈꾸는 과정에서 사회적 압박에 휩싸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 내적 투쟁에서 공포를 현실로 만드는 형이상학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현대인의 의식구조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SNS와 인터넷 등으로 공유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빅테이터와 인공지능이 도래하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미 타인의 수많은 데이터를 통섭하여 새로운 데이터(자아)를 만드는 시대라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기능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 과감한 용기가 존재론적 질문만으로 서스펜스가 가능케 한다.
#23 : 교사형(絞死刑·1968) 오시마 나기사
오시마 나기사는 인터뷰와 저서에서 박수남 감독의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를 표절해서 영화 〈교사형〉을 만들었다고 명시한다. 사형제도와 재일 한국인 문제를 제기한다. 22살의 재일 조선인 R의 교수형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형 집행을 목격한 적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R이 집행했음에도 살아남음으로써 형 집행의 법적 근거가 소멸한다. 1958년 고마츠가와 사건을 바탕으로 브레히트 연극 기법을 통해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자들의 위선, 편협함, 무능함을 폭로한다. 그들에게 끔찍한 권력을 부여한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가한 죄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국가라는 상상(사회계약설)의 산물이 자행하는 폭력을 담은 복잡한 희극이다.
#22 : 흐트러지다 (乱れる·1964) 나루세 미키오
박찬욱 감독의 인생 영화이자 다테미네 히데코의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작품,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는 조그만 가게를 꾸리며 20년 가까이 늙은 시어머니를 비롯해 시댁 식구들을 돌보고 있다. 시동생 ‘고지(가야마 유조)’는 그동안 고생한 형수에게 보답하고 싶지만, 시누이들은 올케가 재가해서 집에서 떠나 주길 바란다. 시댁에서 쫓겨날 처지의 레이코에게 고지가 뜻밖에 고백하는데, 레이코는 놀라면서도 마음이 흐트러진다. 야간열차에서 서로 밀당을 벌일 때의 긴장감이 일품이다. 긴잔 온천에서의 마지막 쇼트에서 다카미네의 클로즈업된 얼굴을 수많은 격찬을 받으며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21 : 산쇼 다유 (山椒大夫·1954) 미조구치 겐지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감독)상
미조구치가 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대단하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오슨 웰스,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콜세지, 아리 애스터 등이 그를 높이 평가한다. 1915년 모리 오가이의 단편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11세기 헤이안 시대에 관리였던 아버지가 영주에게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어린 남매는 어머니(다나카 키누요)와 헤어져 잔인한 호족에 의해 노비로 팔려 가는 내용이다.
미조구치는 어릴 적에 가난해서 그의 여동생을 게이샤로 팔았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13세에 자퇴하고 영화계에 뛰어든 그는 ‘여성의 희생’을 필생의 테마로 삼았고 〈산쇼 다유〉는 그의 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다. 형식과 내용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전체가 부분의 합을 훨씬 초월하는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다. 미야가와 가즈오의 촬영은 미조구치의 비전을 훨씬 더 정교하고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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