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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틸 라이프 Aug 27. 2023

이니셰린의 벤시


고립된 섬 이니셰린은 연극을 영화로 옮길 때 단조로운 무대의 지루함을 덜기 최적의 장소다. 오프닝 신의 시선으로 멀리 조망하는 섬은 초록 들과 돌로 반듯하게 경계를 이루고 가파른 절벽 아래 바다는 태초 자연을 주무른 신들의 선물 같다. 가까이 다가가자 불퉁한 원주민을 닮은 단단한 경계석과 거친 파고는 탈출을 어렵게 하는 폐쇄된 사회임을 눈치채게 한다.
영화에는 허투루 등장하는 인물이나 소품, 가볍게 소모되는 대사가 없다. 연극에서 출발했기에 고유한 개성으로 타오르는 캐릭터는 이야기의 힘으로 구체화된다. 선명하고 오래된 관계의 역학과 변화 그것에서 파생되는 불가해한 심리를 다루는 마틴 맥도나의 깊은 대사는 아일랜드 역사까지 생각이 닿도록 대단히 은유적이고 통찰력 있다.
음악을 사랑하고 섬 안의 섬 같은 콜름(그의 집은 바닷가에 외롭게 있다)은 다정한 수다쟁이 파우릭에게 지루함을 이유로 절교를 선언한다. 하루아침 날벼락같은 단짝의 통보가 납득하기 어려운 파우릭의 고집은 두 사람을 파국으로 이끈다.

사방 통로가 단절된 이니셰린은 바꿀 수 없는 바뀌지 않는 상수다. 그래서 콜름은 자신을 바꾸려 결심한다. 하찮은 말로 시간을 메꾸는 관계를 끊고 영원히 존재하는 예술에 헌신하기로 다짐한다. 그가 흑맥주를 즐겨하는 펍에서 어울리는 사람은 주로 외지에서 건너와 새로운 활력을 주는 사람들이다. 섬에 붙박이인 그를 지루함에서 구제하는 것은 본토의 소식을 전해주고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이전까지 그의 세계이던 파우릭도 섬을 떠나기는 어려운 인물이다. 다정한 간섭이 상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친구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자극한다. 말과 행동, 서로 다른 방식의 언어로 불화하는 둘 사이 소통 메신저인 여동생 시오반은 마을에서 드물게 책을 읽는 사람이다. 그래서 콜름은 막연히 죽기만 기다리며 이곳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닌 시오반을 알아보고 그녀는 콜름의 판단처럼 안주하지 않고 외부로 구호 신호를 보내고 섬을 떠난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수용 못하는 오빠는 시오반이 집을 떠날 때조차 밥 걱정이 우선이다. 당나귀 제니를 여전히 집에 들이고 여동생과 친구의 간청을 무시하지만 파우릭의 사랑은 그런 식이다. 완곡한 진심에 귀를 열지 않는 파우릭에 콜름이 대답하는 방식은 손가락을 자르는 극단적 폭력이다. 두 사람은 모자람 없이 닮은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묘하게 성적으로 긴장한다. 아들을 추행한다는 벌거벗은 아버지, 한 집에서 침대를 이웃하는 성인 남매, 비이성적으로 단절을 거부하는 동성 친구. 윤리적인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근친 관계의 은근하고 모호한 암시와 설정은 남북으로 오랫동안 분열하는 아일랜드의 지속적인 내전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마을을 굽어보는 마리아로 시작해 두 사람을 주시하는 마을의 노파 맥코믹으로 마감한다. 중간중간 십자가와 예배당으로 짐작하듯이 이니셰린을 지배하는 정서는 가톨릭이다. 영혼을 구성하는 종교는 안식과 위로이자 지배와 억압일 수 있다. 영화에서는 후자에 훨씬 가깝다. 카메라가 강조하는 마리아나 십자가는 모두 이니셰린을 위에서 감시하는 독재자 시점이거나 섬에서의 탈출을 막고 주어진 운명을 신탁하는 주관자처럼 위치한다. 콜름은 두 번 고해성사를 한다. 외부에서 (아마 본토로 추정되는) 배를 타고 온 신부는 일방의 주장을 옮기거나 경찰을 두둔하는 비종교적 언행을 일삼는다. 그는 거룩한 종교인의 전형에서 벗어난 캐릭터로 고해실 밖으로 나와 소리치는 모습은 군림하는 집정관이나 권위로 누르는 정부의 대리인처럼 보인다. 종교와 함께 섬을 지배하는 다른 권력은 경찰의 공권력이다. 본토의 사형 집행 참관을 유희로 떠벌리며 아들을 추행하는 부도덕한 아버지로 이 또한 아일랜드를 압제하는 힘을 현상화한 인물이다. 맥코믹의 예언대로 죽음을 맞는 동네바보 도미닉은 소문과 실재가 의심되는 희화화된 인물로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편견 없는 눈을 가졌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학대당한다.
이니셰린 사람들의 반목과 여러 설정 무엇보다 파울릭과 콜룸의 고집과 불통 극단적인 폭력과 방화는 자연스럽게 기나 긴 아일랜드의 투쟁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마틴 맥도나의 탁월한 시나리오는 사소한 다툼으로 관계를 들여다보게 하고 여전히 화약고인 아일랜드 내전으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척박한 고립에서 다정함과 예술로 다투는 두 남자를 하나로 묶는 것은 당나귀와 개 같은 무해하고 선한 동물들이다. 영화에서 이니셰린의 사랑스러운 동물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악당 롤인 신부와 경찰뿐이다. 당나귀 제니의 우연한 죽음으로 파우릭이 집을 불태워도 콜룸은 고개를 숙이며 수긍한다. 거의 유일하게 두 사람이 이견없이 소통하고 공감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자식 같은 제니의 죽음과 방화 후 둘은 절연했을까. 여동생과 제니가 떠나 이제 콜룸처럼 온전한 혼자가 된 파우릭은 콜룸이 자해하며 외치던 말을 곰곰이 반추하는 시간과 비로소 대면할 것이다.
맥코믹 부인이 예언한 두 번째 죽음은 제니의 희생이다. 이니셰린의 벤시(정령)는 섬의 터주신 마고 할멈(이니세린은 제주의 풍광과 역사를 닮았다), 맥코믹일지 모르겠다. 마을의 모든 사실을 미리 알아 멀리서 운명을 굽어 보는 그녀는 셰익스피어 극의 전능한 마녀 예언자를 닮았다. 스스로 떠난 사람과 죽음으로 탈출하지 않는 한 이니셰린 사람들에게 지루함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의 심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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